◆호떡 장수 아저씨
중2 겨울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하교 후 나는 갈 곳이 없어서 방황하고 있었다.
초승달 뜬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삭풍은 허기진 나를 더 허기지게 했다.
엄마가 하늘로 가서 별이 되시고 아버지는 돈 벌러 가신다고 집을 나가신 후 소식이 끊긴 터라 4남 1녀는 뿔뿔이 흩어져 이 집 저 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학교에 다녔다.
형과 누나는 고등학생이라 입주 가정교사라도 할 수 있었지만 어린 나를 선뜻 받아주는 곳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아침에 큰집에서 나올 때 "오늘 오후에 둘째가 제대해서 집에 온다고 하니 학교 끝나면 너의 외갓집으로 가거라"라는 큰어머니 말씀이 있었다.
얼마 전에 외갓집에서 나와서 큰집으로 간 터라 다시 외갓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바람은 차고 배는 고프고 신세가 하도 처량하여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밤은 깊어 자정 통금시간이 다 되어가는 시각에 내 눈 속에 반가운 호떡 수레가 들어왔다.
무작정 들어간 수레에는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함께 그날 장사를 끝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다짜고짜로 "아저씨! 그 연탄불 끄지 마세요. 저 오늘 여기서 자야 해요"라고 말했다.
아저씨는 교복을 입은 채로 울면서 말하는 나를 보더니 " 너, 부모님께 야단맞고 가출을 했지? 이 녀석아! 부모란 다 제 자식 잘되라고 야단도 치고 매도 들고 그러는 거야. 집에서 걱정하고 계실 테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라고 말씀하시면서 팔다가 남은 호떡을 두어 개 주고는 연탄불에 물을 부어버리는 것이었다.
울면서 호떡을 먹는 사이에 연탄불은 꺼지고 아저씨는 빨리 집으로 가라고 재촉을
하셨다.
고아 아닌 고아 신세가 된 나는 대성통곡을 하고 사연을 들은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차시면서 내 손을 잡아주셨다.
아저씨 집으로 따라 갔더니 단칸방에 애들이 세 명이나 자고 있었고, 나는 자는 둥 마는 둥 웅크리고 있다가 아침에 아주머니가 끓여 주시는 우거지 죽을 맛있게 먹고 등교 준비를 하는데 내 등을 쓰다듬으며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사서도 한단다.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해! "
이후 본과 3학년 때까지 가정교사 생활을 하며 간신히 의대를 졸업하게 되었다.
인턴을 끝내고 다시 찾아간 그곳에는 호떡 수레도 이미 없어졌고 아저씨는 어디로 이사를 하였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따뜻했던 온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내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자주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투병일지
중2 봄방학을 맞아 중3 진학준비를 하던 중 발끝에서 시작된 마비 증세가 서서히 올라와 며칠 지나지 않아 온몸이 마비되어 목과 양팔 밑으로는 움직일 수도 없고 감각도 없어 대소변 처리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 가출한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시기는 했지만 가난한 아버지가 내 병을 위해 하실 수 있는 것은 다 큰 아들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할 것이 없었다.
앉을 수만 있으면 창밖 풍경이라도 볼 텐데 누가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사지가 뻣뻣해지면서 팔도 다리도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누워서 그냥 죽을 수가 없어서 이 병원 저 병원 심지어는 부산 제3 육군병원까지 찾아 갔었다.
그러나 진단 결과 답은 한결같았다.
''특별한 치료 방법이 없습니다.''
사춘기 예민한 감성이 나를 가만히 놔두지를 않았다.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 않았다.
◆기적을 만나다
유월 중순 엄마 제사를 지낸 다음 날 새벽에 어디선가 까치가 울고 있었다.
엄마가 다녀가시면서 보낸 까치였다.
그날 오전에 반갑고 반가운 전보를 받았다.
부산대학병원에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외국 유학을 다녀오신 유명한 교수님께서 수술을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대학병원에 입원해 정밀진단을 다시 하고 수술을 받게 되었다.
임상시험용 수술이라 일체의 치료는 무료로 한다.
단 만일에 수술에 실패할 경우에는 대학병원 해부실습용으로 시신을 기증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렇게 운명의 신께 아니 조 성옥 교수님께 내 모든 것을 맡기고 수술대에 올랐다.
9시간 만에 무사히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을 거쳐서 병실로 돌아왔다.
의식이 회복되자마자 이 병으로 수술을 받은 환자가 내가 두 번째고 내 앞서 수술을 받았던 강원도 아주머니는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나도 과연 살아 퇴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의과대학 해부실습용으로 남겨지는 신세가 되는 것은 아닐까?
착잡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가 만난 의사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양 팔과 얼굴 뿐, 몸뚱이는 완전 마비라 꼼짝을 못하니 욕창이 생겼다.
피부이식 수술을 세 번이나 했었지만 다 실패하고 네 번째 수술을 마치고 나온 며칠 후 간병해주던 누나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그만 침대에다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내가 내놓은 오물이지만 이것이 다시 상처로 들어가면 수술을 또 한 번 더 해야 하는데 이식에 필요한 피부를 떼어낼 수 있는 곳이 더 이상 없는 절박하고 황당한 상황이 되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홍길동 아닌 김의진 선생님이 " 짜자자잔!" 하고 나타났다.
간호사도 부르지 않고 장갑도 낄 겨를도 없이 양 손으로 그 오물들을 신문지에
옮기는 것이었다.
예민하다는 사춘기에 환자가 된 나는 수시로 김 선생님을 괴롭혔다.
시도 때도 없이 마치 내 가족인 것처럼 불러댔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얼굴 한번 찡그린 적도 없었으며 힘들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
참 신기했다.
언제나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병실에 나타나는 저 의사는 도대체 잠은 언제
자는지 식사는 어떻게 하는지 어디 있다가 저렇게 총알같이 나타나는지?
항상 콧노래를 부르며 다니는 김 선생님의 인기는 말 그대로 최고였다.
환자들한테만이 아니라 병동 간호사들에게서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무리 의사라도 맨손으로 오물을 만진다는 것은 쉽지 않을 터인데 거의 본능적이고 반사적으로 하는 김 선생님의 처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나의 은인을 넘어 영웅으로 내 마음 속에 깊이 모시게 되었다.
당시 내가 장차 의사가 될 것이라고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그때에 그는 이미 나의 영원한 정신적 지주가 되셨다.
(4월16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 '늦깎이 인생' 3회가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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