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기특한 당신

손수민 영남대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손수민 영남대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나는 워킹맘이다. 엄마이지만 동시에 의사이기도 한 나는, 하교하는 아이를 맞아 주지도 못하고, 아침 미팅 때문에 일찍 출근하면서 깨워놓고 간 아들이 다시 잠들어서 지각을 하는 일도 잦았다.

아이는 내가 한 요리보다 밀키트 음식을 더 좋아하고, 체육복 세탁이 안 되어 있어도 '그러려니' 한다. 세상엔 수퍼수퍼수퍼우먼들이 얼마나 많은지, "학교 과학시험 6번 답이 왜 3번이냐"며 토론을 하는 엄마들을 보면서 6번 문제가 뭔지도 모르는 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고,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워킹맘이라 꼼꼼히 챙기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자책도 많이 했다.

의사들이 주인공인 드라마에서 놀이동산에 가기로 했다가 환자가 나빠졌다는 전화를 받고 아들 눈치를 보는 아빠에게 아들이 "아빠 난 괜찮으니 빨리 병원 가봐"라고 선수치는 장면에선 떠오르는 옛기억으로 완전 울컥했다. "그래도 난 엄마가 교수인 게 좋아"라는 아이의 지지가 없었다면 아이에 대한 미안함으로 진즉에 사표를 썼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 친구 중에, 주부라는 직업으로 월급을 받는다면 억대연봉일 거라고 생각되는 친구가 있다. 몇 년 전 친구집에 놀러 갔다가 나는 한껏 위축되었었다. 부엌에 걸린 달력에는 아이들과 뭘하며 놀지가 준비물과 함께 빽빽히 적혀 있었고, 직접 만든 그림책이며 인형이 그득했다. 점심 때 내놓은 요리는 비주얼부터 무슨 호텔에 온 것 같았다.

친구에게 다녀온 후 워킹맘으로서 내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친구가, 자신이 너무 마음에 안들고 부족한 것 투성이라는 거였다. 아니, 요리면 요리, 육아면 육아, 나는 발뒷꿈치도 못따라가는 친구가 아닌가. "너는 주부라는 직업으로는 억대연봉일 거"라는 말에 "난 그저 주부인데, 교수인 니가 나를 칭찬해 주니 자존감이 살아난다"고 했다. 나는 구멍투성이인 엄마라서 부끄러웠는데, 내 친구는 그저 엄마이기만 해서 부끄럽단다.

나는 재활의학과 의사다. 성형수술은 잘할 필요가 없다. 재활의학과 의사이니 재활치료만 잘하면 된다. 나는 친구만큼 주부의 일을 완벽히 해내진 못하지만 내 상황에선 이게 최선이다. 내 친구가 MRI를 몰라도 상관없는 것과 같다. 친구도 나도 완벽하진 않지만, 지금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든 그 자체로 우리는 이미 기특한 존재가 아닐까.

사람들은 모두 각기 다른 자리에서 다른 색깔로 살아간다. 그저 당신은 노랑이면 되는 거고 나는 초록이면 되는 거다. 그러니 노랑인 당신에게 초록이 없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다.

요즘 세상은 사람이 AI와 경쟁해야 하는 시대이다.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오늘의 실패로 내일은 좀 더 현명해 져 있을 거라 믿고 (꼭 더 현명해지지 않아도 괜찮다) 하루하루 진지하게 채워나가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BTS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당신은, 이미, 기.특.하.다.

손수민 영남대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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