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짙은 밤 내전 앞 연못, 유신이 흙바닥 한구석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구석엔 열댓 개의 작은 돌덩이 두 뭉텅이가 서로 대각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하나는 월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명활산성이었다. 유신은 돌 몇 개로 만들어진 두 성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월의 밤공기는 서늘했다. 유신은 마치 소리가 생각을 해칠 것처럼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흙바닥에 자리한 두 돌의 대치 역시 미동도 없이 계속되었다.
그 꼴은 실제로 7일간 계속되었다. 월성과 명활산성 사이에선 어떤 충돌도 일어나지 않았고, 유신은 가만히 지켜볼 따름이었다. 군사들 사이에서 유신이 수성(守城)을 택한 것이란 말도 있었고, 지레 겁먹은 것 아니냐 혹은 싸울 생각이 없는 것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노장은 매일 아침 순시 돌며 군사들의 사기를 살필 따름이었다. 성에서 싸울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싸움을 하지 않으려는 것도 아닌 것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10리 앞 명활산성에선 비담의 군사들이 월성을 노려보고 있었으나 서라벌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고요하고 적막했다.
상황은 명료했다. 유신은 월성에서 왕을 지키고 있고, 비담은 명활산성에서 난을 일으켰다. 명분은 유신에게 있고, 비담은 죄인이었으니 난을 진압하고 비담을 죽인다고 유신에게 해가 될 일은 없었다. 선과 악이 명확하고, 의와 불의가 분명하니 난을 진압하면 그만인 것을 유신은 무엇 때문인지 국난의 상황을 길게 끌었다. 그로 인해 마음이 조급한 것은 유신의 옆에서 횃불을 들고 있는 젊은 군장뿐이었다.
하필 사흘 전 하늘에선 별 하나가 떨어졌다. 이에 비담 군영에선 왕이 죽을 것이란 소문이 났고, 비담 군영의 사기는 더할 나위 없이 높이 치솟았다. 이는 좋지 못한 징조였다. 별의 움직임을 진정 그런 의미가 없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사람의 마음이 요동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젊은 군장은 두려움이 퍼지기 전, 군사를 일으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그리 생각하십니까." 젊은 군장은 결국 유신의 침묵을 깨뜨렸다.
유신은 젊은 군장을 올려다보았다. 사내의 작은 눈동자는 맑은 안광을 가지고 있었다. 의롭고자 하는 의지가 명백했다. 허나 그것이 바로 젊은 군장의 부족한 점이었다. 안을 밖과 같이 떳떳하게 만들어 맑은 시냇물처럼 숨김없이 드러내니 의로운 전장에선 쓸모 있으나 그렇지 못할 땐 쓸 수 없는 눈동자였다. 무릇 바다는 맑은 시냇물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 많은 것을 이해하기엔 아직 시간이 필요한 눈빛이었다. 유신은 다시 흙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명활산성을 지키는 법을 생각한다."
유신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지켜야 할 것은 월성이었고, 명활산성은 무너뜨려야 할 것이었다.
"어째서 적을 지키겠다고 말씀하십니까." 젊은 군장은 유신을 의심했다.
"그것이 이 땅을 지키는 방법이다." 유신은 군장의 의심을 잘라내듯 그의 물음에 바싹 붙여 답했다.
하지만 유신의 대답은 그를 더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군장은 어둠 속에 숨은 유신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눈꺼풀이 눈을 지그시 가리고 있고, 이마나 미간 어디에도 주름진 곳이 없는 것이 읽을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었다. 노장은 언제나 침착했다. 담담히 명을 받들어 싸우는 것 말고는 사심을 드러내는 일이 없으니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행하려 하는지 군장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군장은 이해할 수 없는 노장의 얼굴이 의심스러웠다. 지키고자 하는 것 무엇입니까. 월성 땅입니까, 늙고 병든 왕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권력입니까. 속으로 질문들을 쏟아내던 군장은 불현듯 확신했다.
이 자가 늙고 병든 여왕을 버리려 하는구나.
"계속 이리 기다리실 생각이십니까." 군장은 한기 어린 목소리로 채근했다.
"필요한 시간이다."
유신의 대답에 젊은 군장은 더는 묻지 않았다. 유신은 젊은 군장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유신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진 못했을 터인데도 더는 물음이 없다는 것은 제 안에 답이 그려진 것이다. 이를테면 시냇물로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답이.
고개를 들자 군장의 눈동자엔 날 선 의심이 서려 있었다. 유신은 잠시 생각했다. 이 자가 나를 붙잡고 따라올 수 있을 것인가. 유신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구한 열매에 벌레가 있다면 그 열매를 버릴 텐가 아니면 자식에게 먹일 텐가."
"열매를 버립니다. 벌레가 들면 열매는 모두 썩은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아이에게 먹일 수 없습니다." 군장은 오래 생각지 않고 답했다.
"만일 자네의 자식이 보름 동안 굶어 생사를 오간다면 어떠한가." 유신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자네는 그 열매를 버릴 텐가. 아니면 그 열매를 먹일 텐가."
열매를 먹입니다. 젊은 군장의 머리에선 곧바로 답이 나왔다. 하지만 직전과는 정반대의 답이 떠오르자 군장은 제법 당황스러웠다. 유신은 자신의 물음이 맑은 시냇물을 혼탁하게 만들었음을 모르지 않았다.
"나는 벌레만 빼내어 그 열매를 다시 먹을 생각이네."
그 순간 젊은 군장은 노장의 침묵을 이해했다. 이 자는 싸우지 않고 난을 진압할 요량이었구나. 비담이 데리고 있는 2만의 군사들을 탈 없이 흡수해야지만 난 이후에도 외세로부터 사로국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노장의 침묵은 바로 그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는 월성과 명활산성이 아니라 사로국 전체를 보고 있었고, 작은 승리가 아니라 큰 평화를 찾고 있었다. 여태껏 그는 그 난제의 해답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군장은 유신의 침묵을 이해한 순간 문득 깊은 바다에 빠져버렸다. 유신이 마주하고 있는 물음은 방향 없이 파도치는 깊은 바다와 같았다. 자칫하면 중심을 잃고 낯선 곳을 표류하거나 그 자리에서 곧장 침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신의 무정한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바다 너머 어딘가를 직시하고 있었다. 무거운 갑옷 아래 범부(凡夫)의 몸에는 섬찟한 소름이 돋았다.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네.
이내 길은 찾은 듯 유신은 젊은 군장에게 말했다. 군장은 말없이 유신의 뒤를 따랐다.
4.
여왕은 유신을 만난 날 새벽 눈을 감았다. 이후 진평왕의 친동생인 국반 갈문왕의 딸 승만이 왕위에 올랐다. 그녀는 얼굴이 넉넉하고 키가 일곱 자나 되었다. 유신은 그날 밤 젊은 군장에게 지시해 불붙은 허수아비를 연에 달아 하늘 위로 날렸다. 유신은 다시 떠오른 별을 잠시 올려다봤다.
다음날 그는 백마를 하나 잡아 제사를 지냈다. 유신의 옆에 자리한 젊은 군장의 눈동자는 여전히 혼탁했다. 그는 유신의 행동을 모두 이해할 순 없었으나 더는 묻지 않았다. 유신을 믿어서인지 두려워서인지 알 수 없었다. 유신은 젊은 군장을 그런 채로 그대로 두었다.
정월 보름이 가까워지자 달은 넉넉하게 채워졌고, 볕은 조금씩 따사로워졌다. 날이 따뜻해지면 굳게 마음먹었던 것에도 빈틈이 생긴다는 것을 유신은 모르지 않았다. 보름달이 모두 채워질 때까지 유신의 군사들은 휴식을 취했고, 그건 비담의 군사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유신의 군사는 월성에 있었고, 비담의 군사는 월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곳엔 왕이 있었고, 다른 곳엔 반역자가 있었다. 그러니 한 곳의 마음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이 차올랐고, 다른 한 곳의 마음에는 의심의 싹이 돋아날 수밖에 없었다. 유신은 그 이치를 모르지 않았다.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떴다는 소문은 월성을 넘어 명활산성으로 퍼졌다. 무용하게 흐른 보름이라는 시간과 다시 떠오른 별의 소문은 비담 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트리기에 충분했다. 별은 떨어졌으나 다시 올라갔다. 계집 왕은 죽었지만, 같은 계집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시간이 갈수록 비담의 속만 뒤틀릴 뿐 월성은 변함없었고, 사로국의 이름난 노장은 여전히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매일 밤 비담은 밤하늘을 바라봤다. 여전히 동녘 기둥별은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수일이 지나도 월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 하늘의 별과 저 땅 위의 달은 아무런 소리 없이 비담을 꾸짖는 것만 같았다.
정월 17일, 유신의 군사는 언 땅을 박차고 월성을 나섰다. 유신의 1만 군사들이 명활산성 앞으로 진격했다. 명활산성의 체성은 수직으로 곧게 서 있었다. 성벽의 밑에는 높은 성벽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부채꼴로 보축되어 있었고 성 내부에는 흙을 다져 넣어 성고(城高)는 높고 성곽은 단단했다. 난을 일으킨 지 보름이 지나서야 무기를 손에 쥔 명활산성의 군사들은 무엇 때문에 무기를 들었는지 한참 생각했다. 그것이 계집인 선왕 때문인지 아니면 새로 왕이 된 계집 때문인지. 아니면 별이 떨어져서 문제인 건지 별이 다시 올라가서 문제인 건지. 그것들이 도대체 무엇이 문제라는 건지. 도통 감정을 알 수 없는 노장의 얼굴을 훔쳐보며 군사들은 생각했다.
그리고 성벽 앞에 선 노장은 말했다.
"군자가 사냥할 때는 오직 짐승의 삼방(三方)만을 가린다. 도망치거나 무릎을 꿇는 짐승을 해치는 것은 예로부터 군자의 덕이 아니다. 군자는 오직 맞서 싸우는 짐승만을 사냥한다. 그러니 나는 도망치거나 무릎 꿇는 자는 해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와 맞서 싸우는 자가 있다면 그자만은 반드시 잡아 머리를 부수고, 그자의 9족을 멸할 것이다."
잠시 후 명활산성의 성문은 열리고, 이내 비담이 나왔다.
5
위병들은 비담을 유신 앞에 꿇렸다. 비담을 따르던 30명의 중신과 부하들은 이미 참수되어 그 피가 흙바닥을 적시며 말라가고 있었다.
유신은 비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어딘가는 분개하고 있었고, 어딘가는 평온했다. 또 어딘가는 슬퍼 보였으나 어딘가는 겸허해 보였다.
"왕이 되려고 하셨습니까." 유신은 비담에게 물었다.
"이 땅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오."
"무엇으로부터 말입니까."
"벌레들이지요. 나라의 양기를 빼앗아 사방을 위태롭게 만드는 암컷 벌레와 패전국의 피로 백성들을 사지로 모는 수컷 벌레."
유신은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비담의 눈동자를 살폈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자칫 싸웠다간 사로국 전체가 위태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땅을 지키는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벌레가 좀 먹은 열매는 이미 썩은 것일 뿐이지요. 벌레는 열매의 새 주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오."
비담의 말에 유신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우린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상대등."
비담은 오묘한 그의 미소를 이해하지 못했고, 옆에 자리한 젊은 군장은 그것을 이해했다.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소?" 비담은 말했다.
유신은 비담의 질문을 허락했다.
"당신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오. 죽은 계집 왕이오, 아니면 당신의 권세요. 그것들도 아니면 설마 이 땅이오."
비담을 바라보며 유신은 선대왕을 생각했다. 또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했고, 그의 왕을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조부와 증조부, 그들의 왕을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자기 자신을 생각했고, 새로이 즉위한 왕을 생각했다. 그리고 유신은 말했다.
"이 나라를 세운 혁거세 거서간도, 월성에 터를 잡은 탈해 이사금도 이 땅의 사람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유신은 선대왕의 얼굴을 그리며 비담을 바라봤다.
"이 땅은 사람에게 고집을 피우지 않습니다. 말을 타고 오든 배를 타고 오든 이 땅은 사람을 아끼지요. 이 땅은 본디 그런 땅입니다. 어리석은 무인의 과신일지 모르지만, 저는 이 땅의 마음을 지키고 싶소."
죽기 직전 비담의 귀엔 유신의 말이 꼭 왕이 되고자 하는 것처럼 들렸다. 젊은 군장의 귀엔 그저 깊은 땅의 울림처럼 들릴 뿐이었다. 두 중신의 대화는 끝이 나고 상대등 비담의 목은 단번에 잘렸다. 수급(首級)은 흙바닥을 구르고 피는 땅에 흩뿌려졌다.
647년 정월, 명활산성에서 일어난 비담의 난은 그렇게 진압되었다.
그 후 유신은 이따금 밤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끝)
댓글 많은 뉴스
유승민 "이재명 유죄, 국민이 尹 부부는 떳떳하냐 묻는다…정신 차려라"
"촉법인데 어쩌라고"…초등생 폭행하고 담배로 지진 중학생들
이재명 사면초가 속…'고양이와 뽀뽀' 사진 올린 문재인
"고의로 카드뮴 유출" 혐의 영풍 석포제련소 전현직 임직원 1심 무죄
대구경북 대학생들 "행정통합, 청년과 고향을 위해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