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정상회담은 양국이 현재 조율 중입니다. 오랜 기간 냉각된 양국 관계를 한 번에 정상화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번에 관계 개선의 물꼬는 틀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미 정상회담은 원칙적으로 합의했지만, 바이든 대통령의 일정이 유동적이어서 뉴욕 현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출국 전 대통령실이 이렇게 공지했다면 어땠을까. 국민은 큰 기대 없이 덤덤하게 윤 대통령의 행보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장례식은 물론이고 유엔총회 참석도 사실은 의례적인 행사에 불과하다. 그랬다면 한일 정상이 어렵사리 '30분 동안이나' 마주 앉은 사실은 큰 성과로 홍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과의 '48초 만남'도 우리가 염두에 두었던 플랜 B였다는 설명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런 관점에서 대통령실의 일머리가 미숙한 사실은 분명히 지적해야 한다. 일본 정부가 한일 정상회담에 '흔쾌히 동의했다'는 일방적 발표부터 동시 발표라는 외교 관례를 벗어난 것이다. 일본 정부나 기시다 총리의 입지를 좁혀 버림으로써 정상 간 만남을 꺼리게 만든 셈이다. 뉴욕 현지의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한미 정상회담이 확정된 것으로 만든 결과 괜한 실망감만 키운 점도 있다.
이를 전제로 하자면 나는 이번 순방을 굴욕 외교, 외교 참사로 규정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장례식 조문은 말 그대로 의례적인 행사이다.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입헌군주국 국가 통합의 상징인 국왕에 대한 예우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중요 인사만 2천여 명, 각국 정상(급)만 200여 명이 집결한 런던에서 그들에 대한 의전과 일정 등 조율에 영국 정부가 얼마나 머리를 싸맸는지 모른다는 게 현지의 전언이다. 조문을 했네 안 했네, 김건희 여사 모자와 베일이 어떻네, 조문록을 왼쪽에 쓰면 되네 안 되네 등은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는 정말 쓸데없는 논쟁이었다. 조문이란 원칙적으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일반 국민을 위한 영국 정부의 배려라는 게 현지의 시각이다. 나머지 소란들도 아무 근거 없는 가짜 뉴스이거나 비난을 위한 비난일 뿐이라는 게 드러났다. 장례식이 메인이며 윤 대통령 일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주한 영국 대사의 이례적인 설명 저변에 이런 국내의 소란을 비웃는 심정이 자리한 것은 아닌가 싶다.
한일 약식 정상회담을 비판하기 전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3년이 다 되도록 정상회담을 가지지 못한 한일 양국 관계가 비정상이었음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죽창가와 토착 왜구를 외치며 국내 정치용 선동을 위해 외교를 외면했던, 한마디로 외교 실종 시기였다.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독립 등 한일 관계는 이른바 '국뽕'으로 한칼에 자를 수 있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다. 위안부 합의, 강제징용 문제 등의 과제를 외면하고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한일 관계에서 우리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길도 아니다. 기시다 총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행보가 자칫 국내적 비판을 불러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외교란 "강한 나라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약한 나라는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한다"는 투키디데스의 말처럼 한일 관계 개선은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지금 바이든 대통령의 관심은 밖으로는 우크라이나 전쟁 등 유럽 상황에, 안으로는 11월 중간선거에 온통 사로잡혀 있다. 우리 전기차 문제나 통화스와프 이슈 등은 아쉽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우리의 설득 노력을 다각도로 전개하면서 민주당의 중간선거 승리로 바이든의 입지가 좋아지기를 기원할 수밖에 없다. 가짜 뉴스와 비속어 논란 등을 빌미로 대통령이 해외에 있는 시간에도 '외교 참사'로 비난하는 것은 우리의 '정치적 참사'일 뿐이다. 국력의 차이 등 냉엄한 현실을 반영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방문 관련 해프닝을 외교 참사라 되풀이하는 것도 물론 현명한 일이 아니다. "슬픈 사실은 국제 정치는 항상 냉혹하고 위험하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상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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