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독립성시가' 일 관광객 요청

"독립운동의 성지(성지)에서 24시간 일본가요가 흘러나오는 현실을 어떻게받아들여야 합니까"새정부 출범이후 처음맞는 '호국보훈의 달'을 계기로 민족정기회복운동이한창 벌어지고 있으나 1920년대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부산, '백산상회' 건물이 무관심 속에 방치돼 보훈의 달의 의미가 무색하다.

부산 중구 동광동 3가10번지. 민족자본가 백산 안희제선생이 독립운동자금조달 창구로 설립했던 백산상회 건물에 지금은 부산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마음껏 먹고 마시면서 묘한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호화판 요정이 자리해있다.

아담한 2층 기와집에 연건평 1백여평규모인 이 건물은 인근 호텔과 가라오케등을 찾는 일본인들 틈에서 숭고했던 옛 뜻은 까마득히 잊은채 수난의 나날을 겪고 있는 것이다.

안희제선생이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한 것은 1914년말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향인 경남 의령에 있던 논밭 2백마지기를 팔아 백산상회를 설립한 안희제선생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5월에는 자본금 1백만원의 거대한 주식회사로성장, 중국과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다.뿐만아니라 부산의 백산상회는 서상일선생이 대구에서 운영했던 태궁상회,이호연선생의 만주 해천상회, 만주 안동현 성덕상회, 백산상회 원산지점 등과 더불어 비밀연락처 역할도 맡았다.

일제는 안희제선생이 민족지도자로서 신망이 높아지고 그를 정점으로 한 독립운동의 물결이 거세어지자 잦은 감시와 수색으로 괴롭혔고 백산상회도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설립 14년만인 1927년 문을 닫게 된다.

안희제선생은 중외일보를 인수해 날카로운 필봉으로 조선총독부에 대항했고1909년에는 불과 24세의 나이로 대동청년단을 조직, 항일운동을 벌이는등 1942년11월15일 2백80일에 걸친 일본경찰의 고문으로 숨을 거둘때까지 한평생을 조국광복에 바친 애국자였다.

백산상회가 문을 닫은지 올해로 62년.

그자리는 표지석 하나없이 '개선문'이라는 간판을 달고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하기위해 24시간 일본가요'엔카'가 흘러나오는 요정으로 변해있다.조국광복을 온몸으로 갈망한 한 독립운동가의 혼은 자취도 없어졌고 오히려민족정기를 팔아먹는 후손들의 상혼(상혼)만 남아있는 셈이다.다만 지금은 그의 고향에 추모비와 도서관이 건립돼있고 부산 용두산공원한구석자리에 조그마한 흉상이 세워져 있을 뿐이다.

한편 지난 80년대 중반 결성됐던 부산의 백산기념사업회는 회장을 맡았던의학자 고김영소박사(전춘해병원장)사망이후 흐지부지돼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다행히도 옛 백산상회 건물은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정부나 부산시가건물매입비(15-16억원)를 조성, 기념관건립등 적극적인 기념사업에 나서야한다는게 관심있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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