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유랑광대의 고달픈 삶과 예술적 집념을 그린 임권택감독의 영화 가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장기상영에 돌입하고 있다. 섹스와 폭력, 이상심리와 잔혹 취미를 고도의 영상기법으로 배합하여 전세계 영화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할리우드 상품들만 보아오다가 아름다운 조국산천을 배경으로 우리 민족의 한과 설움과 전통예술의 진수를 깨끗하게 극화한 이 작품을대하게 되자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받는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김영삼대통령도 이 영화를 관람하고나서 최대의 찬사를 보냈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덩달아레코드 가게에서도 판을 비롯한 판소리들이 많이 팔린다고 한다.소외되었던 전통음악-이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면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 민족의 전통음악이 그동안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소외되어 왔던가를 반증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치원.국민학교에서부터 중.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이루어지는음악교육은 철저히 양악음계에 기초하고 있다. 농촌에서도 이미 민요는 거의명맥이 끊어지고 있으며 그 자리를 저급한 대중가요가 차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귀는 전통음악을 도리어 낯선것으로 듣게 되었고 우리의 입은 저도 모르게 서양식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었다. 몇해전 학생들에게 민요와 풍물을 가르치던 어떤 교사는 의식화교육을 한다하여 사표를 강요당한 적도 있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예술의 현재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에 모자란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서는민족사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암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총체적 민족사 모순-여기서 요즘 한창 사회적 물의를 빚는 약사법 시행규칙문제로 화제를 옮기면 엉뚱한 비약이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동일한문제의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약사들은 한약 조제권을 주장하고 한의사들은 이것이 자기 고유영역의 침탈이라고 주장하며 맞선 가운데 주무부서인 보사부는 판단불능상태에 빠진것 같다. 내 생각에 이것은 전혀 체계를 달리하는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을 하나의 법령으로 처리한데서 오는 불가피한 마찰이다. 잘 모르기는 하지만 한의학은 인간의 생리와 병리를 종합적으로관찰하며 인체기능의 조화를 회복하는 데서 병의 뿌리를 없애려고 한다. 따라서 일상생활과 치료행위는 단절되어 있다기보다 통합되어 있다. 반면에 현대서양의학은 다른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고도의 기능과 값비싼 기구들이 동원되는 전문가의 영역이다.한의학에서는 의약이 분리되기 어렵지만 서양의학에서는 당연히 분리된다.서양의학과 한의학은 서양음악의 음계와 국악의 음계가 다른 것만큼 다르다고할 수 있으며, 따라서 약사들이 한약을 짓겠다는 것은 서양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국악을 가르치겠다는 것과 같은 발상이다.
양약.한약 구별돼야-물론 오늘의 한의학이 민족의학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주먹구구식 진단과 돈벌이 위주의처방이 계속되는 한 한의학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의학도들로서는 이번의 파동을 각성의 계기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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