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전의장 정치역정

지역구 8선, 현역최다선 의원으로 김영삼대통령과 함께 우리헌정사의 산 증인으로 일컬어지던 박준규전국회의장이 33년간의 정치역정을 끝내고 은퇴를선언했다.금년68세로 그는 지난60년 서울문리대 교수직을 버리고 5대민의원선거에 출마, 당선된 이후 10대때까지 내리 6선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는 그동안민주당구파소속으로 김영삼대통령과 청조회의 일원으로 정치개혁을 주창하기도 했으나 5.16이후 집권당인 공화당쪽으로 변신, 당정책위의장과 당대표를역임했다.

그러나 순탄하기만 하던 그의 정치역정에서도 먹구름이 드리운적은 있었다.79년 10.26사태로 공화당정권이 붕괴되자 정치일선을 떠나 87년까지 미국등지를 돌아다니며 야인생활을 경험하기도 했다. 87년 6.29를 기점으로 정치권의 해빙이 이루어지자 정계에 복귀, 그해말에 있은 13대대선에서 당시 통일민주당후보였던 김대통령의 끈질긴 원조요청에도 민정당의 노태우후보를 지원했다.

이 사건으로 김대통령측이 박전의장에게 감정의 앙금을 가졌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후 정치권에서의 TK원로로서 13대국회 전반기에 민정당대표를 지냈고 후반국회의장을 맡아 14대전반기까지 연임되기도 하는등 누구도 따를수 없는 화려한 의정경력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대통령 취임이후 곧바로 시작된재산공개파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부동산투기꾼}이라는 여론재판식 비난을온통 덮어쓰고 오랫동안 정들었던 여권을 떠났다가 결국 한세대 넘게 정들었던 의정단상을 떠나게 됐다.

그의 정치역정을 돌이켜 보면 일반적으로 두가지의 상반된 시각이 나타난다.하나는 늘 양지만을 따라다니며 화려함만을 추구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따르는 반면 또 다른 하나는 특유의 정치감각과 국제적인 안목을 지닌 거물이라는 시각이다. 박전의장이 의장직을 내놓았을때 국내체류 외국인사들이 그의{사라짐}을 아쉬워했다는 후문이다.

그의 정치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된 대표적인 예로는 89년말 민정당대표시절정계개편설을 최초로 발설, 정가를 발칵 뒤집어놓은 것을 들수 있다. 이 사건으로 대표직을 내놓기는 했으나 90년초 3당합당으로 정계개편이 현실화된 이후 그는 국회의장으로 컴백하게 된다.

그는 {터지고 깨진다}는 5-6공을 거쳐 소위 잘나가던 TK들의 최근 심경을 반영한 결과이긴 하지만 지난5월15일 대구에서 열린 경북고등학교 총동창회에서2년임기의 총동창회장을 4년씩이나 더 맡게되는 이례적인 사건의 주인공이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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