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화통해 항일운동 펼쳐

일제치하에서 영화작품을 통해 민족의 혼을 일깨운 고김유영(본명 김영득)감독이 광복48주년만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돼 생전의 업적을 재조명받게됐다.젊은 나이에 요절한후 후손들도 대부분 세상을 떠나 사촌동생인 김영녹씨(81.구미시 원평동160의1)가 10여년동안 당시의 공적을 찾아헤맨끝에 지난3월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도소에서 당시 검찰의 판결문을 찾아내는데 성공, 이번광복절에 독립훈장 애족장을 전수받게된 것.우리나라 영화사에 나운규사후 당대영화계의 1인자로 평가되고있는 김감독은당시 지식인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했으나 첫작품 {류낭}과 {혼가}등을 통해민족론과 향일의지를 고취해갔다.

1908년9월22일 경북 선산군 고아면 원호리에서 태어나 대구고보(현경북고)에진학 학우들과 독서회를 조직해 항일운동에 앞장서다 불온사상소유자로 낙인찍혀 퇴학을 당한후 서울 보성고보에 편입, 졸업과 동시 문예활동과 대중계몽운동에 전념, 작가 김기림.정지용.림화.이효석등과 교류했다.1928년 조선영화예술인협회가 창립된후 영화를 익힌 김감독은 첫작품 {류낭}을 통해 일제치하에서 땅을 뺏기고 유랑하는 농민의 아픔을 그렸으며 후속{혼가} {화륜}등에서도 당시 민중들의 비극적인 운명과 조국해방을 위한 투쟁의지를 표현했다.

이같은 활동으로 경찰의 눈총을 받아온 김감독은 1934년8월 극단 {신건설사}사건으로 체포돼 표면적으로는 신극운동을 표방하면서 이면으로는 연극으로반전운동을 했다는 죄명으로 징역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1년동안 옥고를 치르고 석방돼 또다시 의정부에 조선영화제작소를 설립, {애련송}을 발표하고 마지막 영화 {수선화}를 촬영하던중 지병인 신장염이 악화돼 1940년1월4일 33세를 일기로 요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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