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정권의 발생과 역할

조선왕조 중기의 인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이 소현세자인데 그는병자호란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북경에서 선교사인 아담 샬과 사귀는등 서양문화에 심취하고 돌아왔다. 그때 조선에는 성리학이 절정에 올라 있었으므로 소현은 조정의 눈총을 받아야 했고 특히 아버지 인조로부터 갖은 박해를 받았다. 그러다가 그만 왕위계승을 눈앞에 두고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다음의 왕위 승계자는 당연히 소현세자의 아들인데 그는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그리고는 소현의 동생 봉림대군이 왕위에 올랐다.그가 효종이다. 봉림도 소현과 같이 청나라에 잡혀갔지만 그는 성리학의 길을 꼿꼿하게 지키다가 돌아와 인조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그래서 왕위를승계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위의 승계 즉 왕권의 발생가치가 법통을 무시한것이어서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우선 끝의 동생 린평대군이 반발하였다. 때문에 인평도 유배되고 그의 후손까지 불운의 왕족이 되었다.그런데 왕권의 발생가치에 불신을 받고 있던 효종은 왕좌가 여간 불안하지않았으므로 궁리끝에 당시의 백성이 오매불망 바라는 병자호란때의 원수인 청나라에 대한 복수정책을 세웠다. 그것이 유명한 북벌정책 또는 북벌론이었다.왕권 승계의 발생가치에는 하자가 있다고 해도 통치역할이 백성의 소원을풀어 찬사를 얻으면 발생가치의 허물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묘안은 성공하였다. 그후 북벌론은 조선왕조의 정치이념이 되었고 나중에는위정척사사상으로 자리하였다.일찍이 발생가치에 허물이 있는 수양대군 세조도 그러한 묘방을 써봤지만 그의 역할이 발생가치의 허물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역사는 그의 왕권찬탈을 용서 해주지 않았다. 멀리 알렉산더 대왕도 아버지 필립에게 정복당한 희랍인의불만을 달래기 위하여 페르샤 원정을 단행했다. 그것으로 희랍인의 마음을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희랍의 역사는 지금도 알렉산더에 대한 찬사에인색한 편이다. 이와같이 정권이나 정부는 그의 발생가치와 역할가치로 나누어 평가하는 것이 역사의 통례이다.

역사적으로 이승만정부나 장면정부는 발생가치가 어떻든 역할가치에 허물이많은 정권이다. 오늘날 세칭 3공화국과 4공화국으로 불리는 5.16정부는 발생가치가 군사 쿠데타에 있다. 때문에 경제개발과 새마을운동을 일으켜 해묵은민족의 과제를 해결하는 역할가치로 발생가치의 허물을 극복해보려고 온갖노력을 쏟았다. 효종 정권처럼 성공할 기미를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3선개헌과 유신체제로 엉망이 되어버렸다.

5공화국과 6공화국으로 불리는 12.12정부는 발생가치는 물론, 역할가치도 싸늘한 평가를 받고 있다. 5공청문회에 이어 6공비리 척결이 국민으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고 있는 것이 그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12.12정권은 발생가치의허물에 못지 않게 역할가치의 실책이 기록될 전망이다.

김영삼 정부가 자랑하는 것은 우선 발생가치에 있다. 그 다음의 역할가치는두고 보아야 알 일이다. 그런데 고속도로 위에 {티코}가 달리는 것 같아 불안하다. 폭풍이 불면 넘어질것 같고 옆에 달리는 심술렴은 트럭에 받혀 다칠것만 같다. 오랫동안 상실했던 정권의 발생가치가 회복되어 그의 정당성에의한 국민적 신망이 두터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국민은 티코가 달리는 길을 지켜주고 있지만, 어디로 가는 것인지 방향이 분명하지 않다.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데 이어 토지공개념을 폭넓게 도입 실천하라. 그래야 국민이 티코가달리는 방향을 알 것이다. 공직자의 재산등록등 지금까지의 개혁정치는 비리척결이나 사정개혁의 차원을 넘지 못한 것이다. 즉 방향은 분명하게 제시되고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대원군의 개혁정치모양으로 끝날수도 있는 것이다.그래서 최소한 토지공개념 체제를 확립하라는 것이다. 정권의 발생가치가정당해도 역할가치가 그에 못따르면 평가는 매정하기 마련이다. 역사는 언제나 냉정하게 기록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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