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국근대불교의 선맥-(중)

한영스님(1870-1948)은 선사라기보다 강백이었다. 근대불교를 이끌며 만해와함께 불교유신운동을 주도했다. 합방되던 해 친일파 승려 회광등이 연합동맹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예속시키려하자 성월 만해 진응스님등과 함께 우리나라는 선종의 특수성이 있음을 내세워 저지했다. 인재를양성하고 생산불교를 실천해서 한국불교의 근대화를 이룩해야하며, 수도자들이 이타행을 실현하는 새로운 수행관을 가져야한다고 역설했다. 일명 석전스님으로 동국대 전신인 중앙학림등에서 강설했고, 개운사 대원암에 불교강원을설치하여 청담 운허스님, 미당 서정주등의 제자를 배출했다. 당대 화엄종주라 일컬어진다.구하스님(1872-1965)은 한때 친일파 누명을 쓰고 통도사 주지 재임시 사재를횡령한 혐의를 받았으나 안창호가 보낸 밀사등에게 군자금 1만3천원을 보낸일지가 뒷날 발견되면서 오명을 씻었다. 김규식이 파리평화회의 전권대사로갈때 휴대한 대한승려연합회 대표자 12인 명의의 선언서에 속명인 김취산으로 서명했다. 통도사 문중을 이루는 경봉스님과 통도사 방장 월하스님이 문하이다. (선원 율원 강원 염불원을 갖춘 종합수도원을 총림이라하고, 총림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스님을 방장이라한다. 우리나라에는 해인총림 해인사, 덕숭총림 수덕사, 영축총림 통도사, 조계총림 송광사가 있다. 총림이 아닌 사찰의 정신적인 지주는 조실이라고 함)

만암스님(1876-1957)은 일제치하에서 호남고불총림을 결성하여 과거 엄격했던 계율과 법식으로 불교의 변질을 막고 승풍을 정비했다. 실질적인 불교정화운동의 효시인 셈이다. 불교 삼학인 계.정.혜에 능했던 만암에 의해 조계종이라는 종명과 종헌이 선포됐으며 사원생활에서 처음으로 교화승(대처)과 수행승(비구)을 구분했다. 1954년 이승만대통령의 불교정화유시이후 비구측이 연전국승려대회에서 종정으로 추대돼 동산.청담등과 함께 정화운동을 추진했다.그러나 조계종조를 삼는 문제에 있어서 보우.보조국사로 의견이 엇갈리자종단정치의 일선에서 물러나 후진양성에 힘썼다. 통합종단 제5대종정을 지낸백양사 조실 서옹스님이 법제자이다.

만해스님(1879-1944)은 국내 불교사상 가장 두드러진 불교유신론자이다. 부모와 형이 동학혁명에 가담하여 피살된 뒤 민중의 고통과 인생의 근본문제에대해 번민하다가 27세에 백담사에서 출가했다. 불교계 잡지 {유심}을 창간하고 {월간 불교}를 인수하여 불교대중화와 혁신운동을 부르짖었고 조선조 이래침체된 소극불교와 일제하에 위축된 불교를 과감히 혁파하여 불교중흥을 위해 노력했다.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던 만해의 불교적 입장은 서산대사 이래 전통불교의 맥을 계승한 ??교겸수이다. 춘성스님이법제자이다.

혜암스님(1884-1985)은 만공 혜월 용성스님등을 차례로 모시고 용맹정진,29년 수덕사 조실이던 월면스님으로부터 전법계를 받았다. 덕숭총림 초대방장에 추대돼 경허 만공 월면으로 이어지는 덕숭산의 승풍을 진작시켰으며 우리나라의 전통적 청정수행풍토를 널리 떨쳤다. 열반 직전 [내가 세상을 떠나거든 간단히 화장하여 사방에 흩어버릴지언정 결코 사리를 수습하거나 부도를세우지말라]고, 사리의 다과로 고승여부를 판가름짓는 세태를 경계했다. 대의법우스님등 많은 법제자가 있다.

효봉스님(1888-1966)은 일제 강점기 판사로 최초의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그순간부터 자신과 사회구조에 대한 회의가 일어 수년간 방랑한 뒤, 금강산 신계사에서 서른여덟 늦깎이로 출가했다. {절구통수좌}라는 별명을 들으리만큼정진수행 일변도였고, 금강산 법기암 토굴에서 하루 한끼만 먹으며 눕지 않고 묵언 정진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1937년부터 10년간 송광사 삼일암 조실로안거하면서 {정혜쌍수}를 주장했다. 가야총림(해인총림 전신) 방장으로 도제양성에 주력하다가 54년 불교정화를 이끌었으며 한국불교계의 통합에 노력하여 62년 통합종단 초대종정에 추대됐다. 구산 법정스님이 법제자이며 시인 고은, 전 조계종전국신도회 박완일회장등이 유발 제자이다. 구산의 법은 송광사방장 회광스님이 전수했다.

동산스님(1890-1965)은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범어사에서 룡성스님을 은사로,성월스님을 계사로 득도했다. 직지사 천불선원에서 3년 결사를 마쳤고, 범어사 금강계단의 전계화상이 되었다. 비구-대처분규 당시 비구의 선봉에서 불교정화를 지도했으나 점진적인 정화를 주장, 한때 수좌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통합종단 직전인 58년에 종정에 취임했다. 문하에 성철 자운 지효 화엄능가 광덕스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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