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퇴계행장 보다 선명히 복원

퇴계 이황이 중년에 쓴 3년치 친필일기가 발견돼 그의 행장연구와 조정사,고지명연구등에 중요자료로 평가되고 있다.유학자 권오봉교수(포항공대)에 의해 확인된 이 수고일기는 퇴계가 42세 되던 임인년(1542)부터 계묘년(1543)을 거쳐 44세 되던 갑신년(1544)까지 3년동안 한자로 쓴 것으로 일기 형태나 마지막 부분이 연결문구로 끝나고, 성우계가 {퇴계연보보유}에서 선생이 평생 무슨 책을 읽었으며, 무슨 허물을 고쳤고,마음을 수양한 사실등을 매일 썼다고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계속 쓴 일기중일부로 여겨진다.

일기는 판심이나 어미 화문등은 없는 저지본으로 42장 83면에 10행 혹은11행이 한자로 쓰여있다. 크기는 세로 28.3cm, 가로 19.2cm이며 년은 높이고월은 한자 낮춰 간자의 지에 맞추었으며 일은 월자에 기두를 맞추어 가지런히썼다.

{임인일기}는 124일간의 일녹으로 4.5월은 빠짐없이 다 적었고, 1.7.10.11월은 초하루 삭일 간지만 적었다. 이 가운데 3월 중순부터 4월 상순까지, 8월하순부터 9월 초순까지는 중종의 명으로 충청도 강원도어사가 되어 감찰한 사행녹이다. 일명 {어사행녹}으로 불리는 이 사행록에는 어느날 어디를 지나 어디서 잤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3월19일자는 "백성들의 굶주림을 덜고, 탐관오리를 적발하기 위해 왕명을 받들어 충청도로 갔다. 이날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용인에서 잤다"(구황척간어사수 명왕충청도 시일풍우숙룡인)고 썼고 이튿날은 평택을 지나 아산에서묵었고, 같은 달 23일은 해미를 거쳐 홍주에서 자고, 예산서 감사를 만난 것으로 행선지를 밝히고 있다.

{계묘일기}는 그 전 해에 암행어사로 다니면서 몸이 많이 상해 서울에 머물면서 병고에 시달린 사실을 1백49일동안 적었다. 이중 3.4.7월은 한달 꼬박썼는데 3월30일 "저녁에는 비가 왔다. 새벽에 노열로 한기가 많이 났다"(석우 효노렬신초자한기태), 4월5일 "밤에 비가 약간 왔다. 약을 먹고, 맥문동을 심었다"(야소우 정소합원 종맥문동)고 돼있다. 저(=착) 부좌 구부현등으로출근(입궐) 결근 휴무일을 표시했다. {갑신일기}는 음력 일년(3백55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썼다. 정월초하루에는 고향에서 사당에 제사지냈고, 인원가에 갔으며 오후에는 부나촌(안동)에 사는 여러명이 보러 왔다(경자 전우사당오왕인원가 석부나촌제인내견)고 했으며, 10월21일 중종이 발병해서 11월15일초저녁 승하, 29일 행장청을 차린 과정이 소상하게 기록돼있다. 섣달 29일에는 형이 대사헌에 임명됐으나 병으로 조정에 나가지 못했다고 돼있다. 갑진년 그믐날은 {제석문 안이사복부다 석}라고 돼있어 저녁(석)에 뭔가를 한 사실을 뒷장에 적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권교수는 퇴계의 사행에 관해서는 중종실녹 임인 3월 기해(19일)조에 충청어사 임명과 검찰후의 간단한 복명만이적혀있을 뿐이었는데 일기의 발견으로 선생의 행장을 보다 선명하게 복원할수 있고, 중종의 승하에 따른 조정의 움직임과 범절, 고지명(분천이 분천)과문집등에 보이지 않는 30여명과의 교우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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