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야용이 30대에 벗들과 만든 {죽난시사} 구성원과 선배들의 시회이던{풍단시회}의 멤버들은 신유사옥등 정치적 격동기에서도 유배중이던 그의 구명운동 즉 {다산해배운동}을 벌였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운동은 노론벽파세력에 의해 사학(천주학)의 정신적인 귀의처라는 이유로 관작이 추탈된 살제공의 억울함을 풀기위한 {살제공신원운동}이라는 외피를 입고 있었으나 채제공이 신원되면 사학과 관련된 죄수도 신원되고 조카사위인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유배된 다산도 자동적으로 신원될수 있다고 판단한 그의 친구들에 의해18년 유배생활동안 지속적으로 펼쳐졌다는 것이다.영남대 국사학과 정석종교수는 다산의 친우관계와 장기.강진 유배기에 친우들이 중앙에서 당시의 정국 추이에 조응해서 그의 구명운동을 벌인 것을 주제로 다룬 논문 {순조연간의 정국변화와 다산해배운동}(국사관논총 제47집)에서이같이 밝혔다.
다산은 벼슬을 하던 30대 시절에 {죽란시사}를 만들어 친우들과 환락을 같이할 것을 약속하는 낭만적인 삶을 영위하였으며 그의 선배시사인 {풍단시회}와도 격의없는 교환을 가졌다. 당시 시사는 선배시사와의 결속하에 상호 영향을미치면서 자파당색의 지주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문예운동의 속성까지 지녔다.신유사옥은 노론벽파의 남인시파 제거를 목적으로 이용된 사건으로 남인은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재기불능의 지경에 이르렀으나 죽란시사 멤버들은 정치적 격동기속에서도 살아남아 다산 해배운동을 모색하였다.이 시사 멤버인 심규로 한치응 윤필병 최헌중은 정국 변화를 지켜보며 유배생활에서 풀려나게 하려는 우회적인 노력 즉 채제공신원운동에 연명하였으나도리어 윤필병 최헌중등이 삭탈되는 죄를 받으며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에도이 운동은 죽란시사의 한 사람이던 홍시제가 소를 올려 다산을 구하려다 자신이 유배를 가는 등으로 계속됐다. 다산해배운동을 주동한 인물은 남인시파김조순계와 순조의 신임이 두터운 한치응이었다.
죽란시회의 멤버들로 살아남은 자들은 한치응과 풍단시회의 선배들로 정치적영향력이 있는 인물 즉 이익운등과 결속하여 벽파계가 박종경과 결탁하여{김한록신원운동}으로 맞서는 속에서 다산해배운동을 지속적으로 치렀다는 정교수는 절해고도와 같은 절망의 나락속에서도 친우에 대한 믿음이 다산의 사상을 키워냈다고 결론지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등 다산의 전 저작은 유배기에 저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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