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경제인여상원 전대구상의회장(5)

67년도에는 대구경제사에 있어 큰 획을 그어 놓았다고 할만한 역사적 의미의일이 이룩된다.대구경제계의 거두 려상원이 공인으로서 남겨놓은 업적중 가장 높이 평가될만한 대구은행 설립이 이 해에 결실을 보게된 것이다. 대구은행의 설립은 상의회장 려상원 개인에게 있어서는 물론 그시절 상공인 모두에게 감격어린 일이될만한 큰 변혁이었다.

비록 규모면에서 보잘것없는 지방은행의 출발이었지만 어려운 경제환경속에놓인 지방기업을 위해 지역자본을 집대성한 새로운 금융기관이 생겨났다는사실 하나만으로도 대구은행의 출범은 당시 대구경제계에 크나큰 의미를 줄수있었다.

여상원은 15년이란 오랜 기간동안 상의회장의 자리에서 일해오면서 동문동상의회관건립이나 구마선부설, 직할시 승격문제등 굵직한 현안들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고 그 가운데 지방은행 설립은 그가 59년도부터 이미 거론해왔던과제중 하나였다.

대구상의는 여회장이 앞장서 59년11월 지방상공업계의 자금줄이 될 지방은행의 설립을 재무부, 상공부, 국회등으로 건의하기도 했고 65년 재무부가 신용조합법을 국회에 제출했을때도 여상원등 15명의 상공인들이 신용조합추진위원회를 구성, 설립을 논의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67년1월17일 박정희대통령이 "지역적 자본을 집대성하여 그지역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내자동원을 위해선 지방은행의 설치를 검토 추진할것"이라는 연두교서를 발표함으로써 이문제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게 됐던 것이다.당시 정부의 지방은행설립 계획은 부산, 대구, 광주등 3개도시로 하되 자본금은 부산이 4억원 대구, 광주가 2억원으로 지역상공회의소가 발기주최가 돼야하는 것으로 짜여져 있었다.

여상원은 대한상의 부회장인데다 박대통령과의 친분등을 따져 전국 최초로대구에 지방은행을 설립하겠다는 생각으로 정부의 계획이 확정되자마자 곧바로 준비작업에 돌입했다.

이순희와의 선거때 자신의 편으로 돌아온 김준성(상의 기획분과위원장)과 함께 이 문제를 놓고 구체적인 추진방안을 논의했다. 우선 자본금 2억원정도는대구경제여건으로 봐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1월23일 상공의원 중소기업협동조합이사장 대구지역 대기업대표등을 모아 가칭 대구은행 설립 추진위원회를 개최했다.

여회장은 "대구상공계로봐선 숙원과제라 할 수 있는 지방은행을 대구가 어느도시보다 앞장서 추진함으로써 대구경제계의 단결과 저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내용으로 설립에 대한 자신의 의욕과 상공업계의 협조를 당부했다.이날 회의에서 43명의 대구은행 설립 준비위원회가 구성됐고 임시의장으로여상원이 추대됐다. 또 임시의장을 포함해 박우흠(대구상의부회장), 배영덕(기계조합이사장), 허병기, 김준성등이 전형위원으로 위촉돼 15명의 발기인을선출하는데까지 일이 진전돼갔다.

발기인으로는 여상원(대구상의대표), 박우흠(직물업대표), 이계수(약업대표),장영봉(비철업대표), 이무일(제지업대표), 김준성(메리야스업대표), 허병기(가구업대표), 이종화(요식업대표), 오일룡(기계업대표), 박기원(운수업대표), 박윤갑(지기업대표) 김시경(도소매업대표), 김석문(유지업대표), 정대룡(청과업대표), 구본흥(백화점대표)등이 선출됐고 발기인대표에 여상원, 상임위원에 김준성, 허병기, 이종화, 간사에 박재룡(대구상의 사무국장)이 맡기로했다.

일에 대한 집념이 매우 강한 려상원은 발기인 대표에 선출된뒤 인사말을 통해 "시중은행에서 지방은행설립을 반대한다고 해서 중도에서 좌절돼서는 안됩니다|지방은행 추진이 중앙방침의 변경으로 그 목적 달성이 곤란할 경우 금융회사같은 형태로 바꾸어서라도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며 대구은행 설립을 강력히 추진해 나갈 것임을 천명했던 것이다.

오늘날 려상원이가 대구은행 설립의 주역으로 인정받고 있는것도 그의 이러한 애착심이 추진과정에서 일일이 나타났고 모두가 그러한 그의 노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상원은 자신의 이러한 공로에도 불구 대구은행에대한 반대급부를바라거나 경영에대한 간섭을 일체 않아 공인으로서 중심을 잃지않는 면모를보여 주었다.

특히 68년 자신의 기업인 동신섬유가 부도위기에 몰려있을때 동신의 모상무가 여회장 몰래 대구은행에 자금을 대출받으러갔다가 거절당한뒤 이 사실을보고하자 "김준성행장의 신세를 지지마라"고 할만큼 꿋꿋한 자세를 견지했다.발기인이 구성된뒤 대구은행 설립준비는 여회장이 대정부 로비를 맡고 실무적인 작업은 김준성이 주축이돼 진행시켜 깊은 인연을 갖게됐으며 특히 김준성이 뒷날 시중은행장과 부총리등을 두루역임하는 전국적 인물로 부각될수있었던 배경에는 여회장과의 만남이 있었기때문에 가능했으리라는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일설에는 대구은행 창립을 앞두고 초대행장 선임에 당시 여회장은 김준성외에 이무일, 오상찬등을 물망에 떠올려 봤으나 김준성의 설립과정의 공로가 크게 인정된데다 학력과 은행경력등에서 김준성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어쨌든 64년 상의회장 선거때부터 맺어진 두사람의 인연은 뒷날행적에서 다시한번 생각해볼만한 대목을 발견할수 있다.

대구은행 설립을 총지휘해온 김준성 역시 대구은행 설립에 공로가 많은 려상원의 예우문제를 놓고 서울의 금융기관등에 자문을 구해받으나 뾰족한 답변을구할수없어 애를 태우던 도중 우리나라 금융사상 유례가없는 회장제 도입을검토하게됐던 것이다.

김준성은 당시 은행감독원장인 문상철을 만나 "대구은행에서 회장제를 택하고자하는 이유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대구은행설립을 앞장서서 추진해온 여회장에대한 단순한 예우일뿐입니다. 또 우리 사나이 세계에서 그러한 의리는 차려야하는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회장제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문원장의 답변은 대구은행에 회장제를 인정해줄경우 다른은행에대한명분을 잃게된다는 이유로 이를 완강히 거절했다.

할수없이 김준성은 재무부 김룡환이재국장을 찾아가 이번에는 다른방법으로설득전을 펼쳐나갔다. "대통령의 연두교서에서 발표된 지방은행 설립문제가대구에서는 려회장을 은행회장으로 추대할수있느냐 못하느냐 하는문제로 왈가왈부 하고있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않으면 대구은행 설립건은 많은 시간이 소요될수밖에 없습니다" 대구은행 설립문제가 순조롭게 진행될줄 알았던김국장은 의외의 얘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대구지역에서의 여회장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럴수있으리라 짐작한 김국장은 은행감독원장을 직접 설득,대구은행 정관에 전국유일하게 회장제를 명기토록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우여곡절 끝에 여상원과 김준성은 대구은행 설립이라는 지대한 공로를 남기게됐으나 한사람은 이를 계기로 부총리라는 영화의 길을 걸었고 또한사람은일생의 공적을 세운지 꼭 1년만에 기업의 몰락을 만나는 불운을 치러 묘한 인생역정을 보는듯하다.

67년 10월7일 대구은행은 명예회장에 여상원, 행장에 김준성을 선임하고 동문동 대구상의 1층에서 개점식을 가졌으며 박대통령이 축하예금으로 보내온10만원이 정기예금 1호로 입금되며 여회장이 소망했던 전국최초 지방은행으로첫발을 내디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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