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을 위해 별을 보고 나갔다가 별을 보고 돌아온다는 평이 나 있을만큼근면성이 돋보이는 기업인이었지요. 구두가 찢겨져 있지 않을 때가 없었어요.철강제품이나 그 원료인 고철더미에 직접 뛰어올라가 현장확인을 몸소 하니까 깨끗한 구두를 볼 수 없었습니다. 술도 두주부사였는데 한번은 술이 거나하게 취한 조양이 대구시내 모 요정의 마담에게 팁을 줬는데 팁을 사양하며이 돈으로 구두라도 새 것으로 사라며 돈을 다시 돌려준 일화도 있었습니다.그는 하루에 잠을 서너시간밖에 자지않고 몸이 가루가 되도록 일에만 몰두했고 집념도 대단했어요. 60년대 우리가정에 전기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을 때전력이 가장 많이 필요한 철강제품제조에 뛰어들정도로 기업경영을 멀리보고앞서가는 개척자정신으로 경영을 해 왔기 때문에 어려운 길을 걸었습니다.여느 기업인들처럼 권력층이나 정치권과 밀착하지도 않았으며 부동산투기등으로 쉽게 거부가 될 수 있는 길도 택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향토의 대표적인 기업인이었다고 할 수 있는 조양 오일룡을 취재하기위해 동일철강을 찾았을 때는 마침 조양의 유지에 따라 설립된 동일문화장학재단에서장학금 전달식이 있는 날이었다.이날따라 오일룡과 친분이 두터웠고 이 곳 장학재단의 관리를 맡고 있던 이종왕(전 대구시장.대구상의 상근부회장), 심재완(영남대 명예교수), 정지철(변호사), 이호내 씨(제일 규산소다 대표.전 동일철강 상무)등이 오일룡의 삶을 회고해 주었다.
동일철강의 창업주 조양 오일룡은 대구 상공회의소 회장(6-9대), 영남대학교동창회장, 경상북도 민간단체 새마을 협의회 회장, 대구시정 자문위원장, 포항철강공단협의회 회장 등 지난 67년 대구 상공회의소 부회장에 당선된 이후76년까지 지역민간단체의 중요직책을 맡을만큼 지역경제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뿐만 아니라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에도 당선되어 그의 활동 범위가 지역은물론 전국을 무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치나 권력지향적이지 않고 오직 제조업, 특히 합금철.연마석 등 기간 산업 개척에 온 정열을 쏟았다.
"조양이 독자로 태어났기 때문인지 슬하에 3남 7녀를 두었지만 혼사를 권력층이나 정치권과 하지 않고 주로 교육계인사들과 한 것만 봐도 {권력은 부가근 부가원}이라는 그의 인생 철학을 알 수있는 대목이었지요"라고 심재완박사는 회고했다.
오일룡은 23년3월31일 경북 상주군 사벌면 금흠리에서 부친 암회공과 모친수원 백씨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손이 귀한 전통적인 중농 집안의 독자로 태어나 유교적인 가풍을 바탕으로 교육을 받으며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쳤다.15세 되던 해에 당시 대구 북성로에서 공구상을 운영하던 외삼촌(백동식 씨)가게인 삼화상공사에 취업하면서 대구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자신의 점포를 소유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10여년간 월급을 한 푼도 빠뜨리지 않고 저축하여 46년 대구시 중구 북성로 1가 42번지에서 농기구와 잠업기구를 판매하는 동일농잠구사를 창립하게 된다. 사업가로서 집념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당시 첫 월급으로 10원을 받기로 하고 이 돈을 전액 외숙모에게 맡겨 저축했다. 그런데 저금의 액수가 기대와는 달리 7원 밖에 되지 않았다. 이유를 알아본즉 숙식비를 제외한 나머지 돈을 저축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자취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동일농잠구사를 설립했고오늘날의 동일철강의 뿌리가 됐다.
처음에는 주로 발동기를 갖다 놓았다. 그러나 발동기의 필수 부품인 벨트가부족했다. 벨트가 있다는 소문만 들어면 원근을 불문하고 트럭을 타고 달렸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벨트와 함께 트럭뒤에 타고와서 턱이 얼어터졌다.그러나 가격은 아주 좋아 돈을 모을수 있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당시 부족하던 농기구와 각종 공구를 일본으로부터 수입해 판매하면서 국내시장을 석권할만큼 자본을 축적했다.
이렇게 바쁜 가운데서도 신학문에 목말랐던 그는 주경야독으로 대구상고 전신인 대구공립전수학교를 졸업하고 ??년에는 영남대학교 전신인 청구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신학문 수련이후 그의 인생관이 많이 바뀌게 된다. 돈만 벌겠다는 일념보다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사회봉사라는 경영철학이 정립된다. 한국근대화의지름길은 산업보국이고 산업의 근간은 철강이며 제조업 특히 기간산업 제품생산에만 매진하게 된다.
이러한 경영철학은 2세들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어 "경영다각화가 필요하기 때문에 금융.정보.건설사업등에도 필요할때는 사업을 확장하겠지만 선친의 뜻에따라 먹거나 입는 소비재 산업에는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80년 2월 선친의 작고이후 동일의 지휘탑을 맡아 탄탄하게 동일을 성장시킨 장남 순택의 얘기다.오일룡은 공구판매로 축적한 자본으로 외국에서 수입해오던 연마제를 국내에서 생산할것을 결심하고 5명이 합작으로 55년 제일연마공업사를 부산시 동래구 남민동 193번지에 설립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제대로 된 제품이 나올수 없었다. 동업자들은 떨어져 나가고 혼자 남게 되었지만 기업을키워 제일연마는 오늘날 연마업계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또한 5년뒤인 60년 7월에는 오늘의 동일철강의 직접적인 뿌리가 된 동일공업사를 대구시 중구 태평로 1가에 설립해 선반작크와 연마포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발, 판매하기 시작했다. 동일공업사에서는 나중에 쇠톱&발동기&반자동선반등을 직접 생산해 판매하기도 했다.
동일공업사를 설립할 60년에는 국내의 전력사정은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사정하에서도 오일룡은 앞으로 공업화의 추진과정에서 전력사정이 나아질것으로믿고 전력다소비업종인 합금철산업에 뛰어들었다. 일본등 산업선진국들을 다니며 산업시찰 결과 전력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산업인 합금철및 철강산업에 투신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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