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설-춤추는 숲(75)

아홉시쯤 되었을까, 아니 자정이 가까운지 모른다. 방바닥에 누워있는 동유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배반(배반)이라는 자책감 때문에무관심으로 위장하였지만 숨길수 없는 사실이 있었다. 살무사로부터 모멸스러운 구타를 당하는 순간-허록과 연결된 현재의 삶에 대한 피곤함과 넌더리가짜증스럽게 일어나는 순간-불현듯 타오르는 것은 의혜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다.왜 이런 이상스러운 감정의 뒤집힘이 일어나는가.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아마 자신을 키워주고 음악을 가르쳐준 허록에게 배반을 용납받을 수 있는절묘한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것은 오히려 뚜렷한 확신이었다. 지금껏 그만한 확신을 느껴보기는 처음일성싶었다. 그래서 반시간이나 넘도록 살무사에게 구타를 당하면서도 유쾌한피학심리(피학심리)가 동반되었는것 같았다.

{그래 당신이 나를 짓이길 수록 나는 의혜에게 달려갈 수있는 보상을 얻게된다.}

동유는 일어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동네를 아마 열바퀴는 맴돌았을 것이다. 숙여들지 않는 어떤 설렘때문이었다.

벌써 밤 깊은 시각이 되었는지 화원문은 잠겨져있었다. 동유는 불꺼진 문앞에 앉았다. 며칠 전처럼 담벽을 타고 올라가 그녀의 방을 기웃거리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않았다.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과 허록의 음악을 벗어버리겠다는 의지는 아무리 열정적인 젊음을 가졌더라도 여전히 설렘이고 두려움이었다.그렇게 얼마동안 주저앉아 있었을까. 동유는 엉금엉금 기어 앞에 떨어진 뾰족한 작은 돌조각을 집어들었다. 바이올린의 선율이 뇌리 속을 흘렀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매혹적인 선율이었다. 그저께 꿈에서 의혜에게 춤을 추게한 그런 선율 같은 것이었다. 음악가들은 만지는 것마다 아름다운 음악이 된다고하셨지요. 의혜의 말이었다.

동유는 뾰족한 돌조각을 손에 들고 머리속에 흘러다니는 선율을 보도블록 위에 마구 그려나가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미친 듯이 그려가는 데 앞에 누군가 서있는 구둣발이 보였다. 고개를들었다. 허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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