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춤추는 숲78

동유는 너무나 놀라 보도블록 위에 까무라칠 뻔하였다. 블록에 음표를 그리고 있던 뾰족한 돌을 어줍게 손아귀로 감춰잡고 가까스로 오금을 펴고 일어났다. 으레 늦은 밤이면 술을 한잔씩 하였건만 이날따라 허록에게는 전혀 술냄새도 풍기지 않았다. 허록은 잔뜩 움츠리고 있는 동유를 흘낏 건네보고는 말없이 그를 비껴 걸음을 옮겼다.동유는 뇌리 속에 가득 메웠던 선율들이 엉켜지고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꼈다.허록의 모습이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다시 바닥에 앉았다. 뽀족한그 돌멩이를 쥐고 계속 음표를 이어서 그리려고 하였지만 이번엔 제대로 옮겨지지가 않았다. 미리 보도블록 위에 그렸던 음표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머리속의 것을 옮기듯이 그려나갔던 그 음표들에서도 이상스러우리만큼 전혀리듬감을 느낄수가 없었다.

무시하려 하였지만 어쩔수가 없는 노릇인가 보았다. 불각 중에 허록과 마주친 데서 오는 위축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허록의 눈에서 기이한 광채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옴을 느꼈었다. 그간 십수년동안 그의내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던 허록의 위상 때문인 것이었다.동유는 뾰족한 그 돌멩이를 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다. 불 꺼진 화원을 보았다. 거기에 그녀가 서 있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갑자기 불이 켜지고 의혜가반갑게 손을 흔들며 그를 불러들일것만 같았다.

동유는 골목길로 들어서는 승용차 한대가 지나가길 기다린뒤, 화원 유리문앞으로 가 손바닥을 펴고 유리문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이마를 유리에 대어보다가 코끝이 찡하도록 입술을 맞추었다. 혀도 움직여 보았다. 유리의 감촉이너무나 부드러웠다. 유리가 부드럽게 느껴진 것은 전에 모르던 일이었다.연거푸 토해놓은 입김으로 입술모양이 유리에 조그맣게 찍혀졌다.이삼십분이 지난 뒤에야 동유는 집으로 들어왔다. 집안이 조용했다. 허록이바로 잠자리에 들었나 싶어 살며시 방문을 열던 동유는 깜짝 놀랐다. 허록이방 한가운데 꼿꼿이 앉아 있는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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