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가락을 찾는 사람들(8)

대구지역에 국악강습소가 부쩍 늘어난 것은 80년대 후반의 일이다. 기성국악인들이 운영하는 국악원과 함께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한 젊은이들이 하나둘씩국악원을 설립, 국악교육의 일선에 뛰어들면서 이들 강습소는 국악인구저변확대에 큰 역할을 맡아왔다. 91년부터 {다스름}이라는 이름으로 국악원의 문을 열고 패기에 찬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젊은 국악인 전상봉씨(30)도 그중한사람이다.경북대 국악과에서 대금을 전공한 그는 졸업후 곧장 국악원을 열어 우리 전통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는 직장인, 주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습을 시작했다. 연주전 손을 푸는 연습곡을 뜻하는 {다스름}에서 이름을 따와 국악원을열때만해도 국악이 이제 막 대중화의 길을 걷기 시작할 무렵. 강좌개설 초창기의 어려움은 이루 다 말할수 없을 정도였다. 현재 다스름국악원에서 국악기를 배우고 있는 수강생 수는 2백명정도. 국악기도 가야금에서부터 거문고.해금.피리.단소.대금.장구까지 다양하다. 강습소 운영뿐아니라 주부대학출강,국민학교 국악반지도등 여기저기로 뛰어 다니는 전씨.

그러나 스스로 국악을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소수의 사람들만으로는 국악저변확대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실감한 그는 국악을 알고자하는 열의 있는 일선학교의 초.중등교사들을 대상으로 꾸준히 국악무료강습회를 개최, 국악을 널리 알리는 파급효과를 기대했다.

[무료강습회를 시작한지 1년이 지난 92년봄 강습회에 참여했던 교사들이 중심이 돼 대구교사국악회를 결성했습니다. 그해 가을에는 교사국악회 관현악단도 창단했어요. 일선교사들의 지속적인 국악활동기반 마련과 학교음악교육의변화를 위해 노력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창단때부터 이들 교사들의 상임지도교사 역할을 맡아온 전씨와 일선교사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결과로 지금도 국악원을 대구교사국악회에 연습장소로 제공하는등 함께 동고동락하고 있다.[올해가 국악의 해라고 국악발전을 위해 사업계획을 잡는등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일선 초.중등학교의 음악교과과정에서 국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부끄러울정도입니다. 국악과 출신이 교사임용때 받는 불이익 또한 국악의 보편화에큰 걸림돌입니다] 이같은 모순점이 해결되지 않으면 진정한 국악대중화는 요원하다는 전씨의 말에서 국악에 모든 것을 건 젊은이들의 고충이 무엇인지 생각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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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새 32

아저씨가 무어라 말할까, 심판대에 오른 죄수처럼 동유는 등 뒤로 방문을 닫고는 가만히 서 있었다. 숨통을 죄는 듯한 침묵이 방안에 괴어 있는것을 느낄뿐, 어떤 대처 방도도 떠오르지 않았다.

허록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불을 펼까요?]

동유는 간신히 입을 움직였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나?]

동유의 말을 듣지 못한 양 나즈막한 목소리로 허록이 다른 것을 물어왔다.어느쪽을 묻는건지 알 수 없었다. 조금전 화원 앞에 앉아있던 일을 말하는가,아니면? 동유는 계속 서있어야 할지 앉아도 되는건지부터도 결정할 수 없었다. 허록과 함께 산 지 십오년동안 이렇듯 어색해져보긴 아마 처음일 성싶었다.

[어저께? 강희란이란 여자분이 다녀갔어요]

동유는 여자분이란 존칭을 의식적으로 써가며 어제 일을 말했다. 어쩌면 여자가 허록에게 자기와 있었던 일을 토로해버렸는지 모른다 싶기도 했지만, 그렇더라도 이쪽이 보다 편한 노릇이었다. 이미 수개월 전부터 몇번의 고비를넘기고 거부하려는 시도를 도처에 비쳐온 허록의 음악에 대해서는 여전히 반박할 자신이 서질 않는 것이었다. 자신의 음악이 어느덧 방향을 틀고 있으며그 원인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모를 리 없는 허록이 아닌가. 가만히 앉아있던 허록이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동유는 제김에 가슴이 뜨악해졌다. 얼결에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오늘 낮엔 그 여자분을 찾겠다며 어떤 사내가 집에 왔었어요]그 사내에 대해서는 조금의 할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허록은 전혀 외면해버렸다.

[내가 그 따위 일에 관심이 없다는 걸 모르나?]

[......]

[네 가슴속에 어떤종류의 악음들이 운동(운동)하고 있는지가 내 관심의 전부다]

여전히 목소리는 낮았지만 어떤 결기가 서린듯한 음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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