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는 허록이 그려준 약도를 들고 그길로 마산행 버스에 올랐다. 이런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유쾌할 수가 있었다.-너 실력이면 초견(초견)에 충분히 켤 수 있는 악보들이다. 혹시 막간에 네솜씨를 손님들에게 한번 과시해 달라 하면, 그 왜, 카덴차(연주중에 주자의기교를 최대한 발휘하도록 삽입한 무반주곡)라 생각하고 대충 응해주면 그만이다. 지배인은 자기네 반주자들이 단순한 딴따라가 아니라고 자랑하고 싶어하거든.
집을 나설때 일러준 말이었다. 아마 그가 받는 일당이란 그 지배인의 허세에지불되는 몫인지 모른다. 마산행 버스 안에서 그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동유는 마산을 이십여 킬로 남긴 지점에서 순간 머리를 때리는 것이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허록이 악사로 일한지 칠팔년이 되었지만 이런 밤무대를부탁한 적은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아무리 마지막 남은 일자리라 하더라도, 이런 부탁은 도무지 평소 그의 자존심과 앞뒤가 맞지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지배인의 허세에 자신을 맞장구쳐서 일당을 받아오는 격인데, 자신에게그 따위를 부탁할 허록은 결코 아니었다.
스승을 드러눕게 한 죄책감과 마지막 남은 일자리 약속이라는 점 때문에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이 마구 떠올랐다. 몸에 별다른 증상도 없는데 끙끙 앓는모습, 그러면서 오히려 이따금씩 날카롭게 그어지는 눈매. 그리고 그때 연습실에서의 무슨 암시적인 듯했던 언급.
-할일을 위해 그 하나를 희생시킬 필요가 있어.
{할일}은 뭐고, {하나}는 또 뭔가. 적어도 동유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듯한 느낌을 충격처럼 받았다. 자리를 비우게끔하는 다급한 이유가 있을듯했기 때문이었다. 몰래 구입한 악보를 불태울 작정인가. 아니면 연습실을망가뜨리기라도...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 정황들까지 머리 속에 뒤엉켜 떠올랐다.
클럽을 찾아가 못 온 사연이라도 말할까 싶었지만 어차피 그런 일자리에 비중을 크게 두는 허록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동유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시대구행 버스를 되짚어 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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