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이사하는 날 혜수가 연극을 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혜수의연극이 처음 공연되는 날 공교롭게도 이사를 하게 됐다고 생각해야 할지. 난이삿짐을 잔뜩 묶어 둔 걸 내버려 두고 혜수가 볼일이 있다며 집을 나설때의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별다른 말씀은 없었으나 혜수에 대한 갖가지 불만을 애써 참고 계시는 듯 했다.[언니, 내가 저녁 살게]
혜수의 말에 시계를 보았다. 벌써 아홉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어머니께서걱정하실 거란 말을 하려다 말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혜수를 따라 나섰다.혜수는 청바지에 손지갑만 하나 달랑 든 간편한 차림이라서 어디 가까운 곳에 잠시 산책이라도 나온듯 보였다. 혜수를 따라 나서다가 혜수가 이미 저녁을 먹었다는 말에 나는 밥만은 집에서 먹는게 최고라는 그간의 경험을 내세워간단히 차나 한잔 하고 가자고 했다. 식욕도 전혀 없다고 했더니 혜수를 잘아는 곳이 있다며 나를 이끌었다. 나는 망설이다 그냥 혜수를 따라 나섰다.혜수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뜻밖에도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작은 까페였다. 당황해 하는 나에게 오늘만큼은 간단히 한잔 하고싶다며 혜수는 그냥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까페의 이름도 그렇지만 실내를 꾸며둔 모양새나 술만 파는 집이라는데도 고급 찻집처럼 아늑한 게 분위기가 아주 독특한 집이었다. 한 눈에 연극이나 음악, 미술,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라는 걸 알수 있었다.
대개 서로 아는 사이들인지 따로 앉아 있어도 서로의 이야기에 끼어들기도하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이 자리 저 자리를 기웃거리며 인사들을 나누었다.혜수도 마찬가지로 그들 몇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혜수와 함께 공연하던 배우도 한 사람 눈에 띄었다.
벽의 한면은 온통 예술가들의 사진을 붙여 두었는데 나도 카프카와 이상의얼굴 정도는 알아 볼 수 있었다. 가장 절실하게 삶과 예술을 받아들이며 살다간 사람들의 사진을 붙여두고 술을 마시며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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