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호길총장님 영전에

우리나라 과학계.교육계의 큰별이 떨어졌습니다.고 김호길초대총장님은 포항공과대학교를 국내에서 최초로 연구중심대학으로창립하여 그동안 국제적 수준의 학사6백89명, 석사8백35명, 박사49명을 배출하였으며 우리나라 대학발전의 한 모델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대학원 교육을 외국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지론을 가지고 계셨으며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본대학에 입학하는 모든 대학원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온 것입니다.

그리고 개교 첫해에 입학생의 학력고사 평균성적이 3백점을 넘게 되었던 것은 2백80점 이상으로 지원자격을 제한했기 때문이며 이것은 고인이 아니면 할수 없던 일입니다.

또한 고 김호길 박사님의 다른 큰 공적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포항방사광가속기를 만드신 것입니다.

1988년4월에 가속기건설추진본부가 발족되었으나 1년반후에는 당초예산보다거의 배나 더 필요, 6백억원의 건설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노심초사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가속기 완공후 운영비를 정부에서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도 고인의 큰 공로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때 받은 심적 고통이 결국 91년 7월 담랑제거수술을 받게 만들기도 했었나 봅니다.포항방사광가속기는 한중수교이전부터 중국과 첫번째 과학기술협력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중국인 학자로부터 {무은재}라는 아호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특히 애통하게 생각하는 것은 금년말로 예정된 방사광가속기의준공을 보지 못하고 고인이 우리곁을 떠나신 것입니다.

저와 고인의 만남은 1966년 2월로서 저는 공군제대후 메릴랜드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시작하는 학생이었고 고인은 메릴랜드대학에 조교수로 부임하였을때입니다. 고인이 60년대초에 서울공대에서 강의를 한 인연때문에 워싱턴지역 서울공대동창회 창립초기부터 같이 활동한 동료들이 본대학에 오시게 된것입니다.

포항공대는 우리나라 대학정책결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으며 작년부터 시작된복수지원제도는 우수한 학생들의 재수를 방지하자는 고인의 발상에서 시작된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교수와 직원, 2천2백여명의 학생을 버리고 어찌 이렇게 먼저 가실 수가 있습니까.

20년을 넘게 외국생활을 하시면서도 한국 국적을 지키고 있었으며 포항공대를 세운 것은 나라위해서 한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던 고인은 드물게 보는 애국자였습니다. 한번 말씀이 시작되면 시간가는 줄 모르게 흘러나오는 그해박한 달변, 이제 다시 어디서 들을 수 있겠습니까. 고인은 한번 사람을 기용하면 오래도록 같이 일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포항공대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만들고 방사광가속기를 효과적으로 운영하여세계적인 연구결과를 많이 내는 것이 고인을 위해서 우리들이 할 일이라고생각되며 우리는 그렇게 할 자신이 있습니다.

무은재 김호길 박사여, 부디 안심하고 편안히 잠드소서.

장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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