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특별기획-동학농민전쟁의 자취를 간다

새총리 인준을 둘러싼 여야간의 정치갈등,각종 범죄로 병들어가는 사회, 물가고등 인간 세상은 끊임없이 머리아프게 돌아가지만 무르익은 봄의 정취속에서 신록의 푸르름이 더해가는 등 자연의 아름다움은 철따라 변함없이 빛나고있다.1백년전 세상의 변혁을 부르짖으며 절박하게 일어선 농민군들이 내달리던 산하도 지금처럼 아름다웠으리라.

1894년 1월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군은 황토현전투에서 전주감영군에 대승을거둔 것을 계기로 인근 고창 무장 영광등으로 진출하였고 4월 하순에는 장성,나주방면으로 향하였다.

이 시기에 농민군의 주력부대는 전주성을 함락시켰고 새로 부임한 전주감사김학진과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이 회담,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하는 {전주화약}을 맺었다.

집강소는 봉건시대의 피치자였던 농민들이 통치주체가 됐던 사상 첫 민중권력기구로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농민군은 집강소 호위군이라는 상비군을 두고 조세징수권도 행사,기존의 질서를 대신하는 정치권력의 물질적 토대를 갖추었다.

동학농민전쟁이 이처럼 농민군의 우세속에서 진행되던 1894년 7월초 최경선이 이끄는 3천병력의 농민군이 나주성을 공격하였으나 나주목사 민종렬의 완강한 수성으로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나주는 당시 전라도 지역중 농민군의 공격을 받고도 통치가 이뤄지지 않았던 곳으로 남아 있다.

대구에서 차로 88고속도로를 타고 3시간여 달려 도착한 광주에서 송정 방면으로 30여분쯤 달리면 나주가 나온다.

동학 농민전쟁 전적지를 1박2일이나 2박3일 일정으로 답사하려면 먼저 발발지역을 돌아본 뒤 고부관아에서 흥덕-고창-무장-장성 황룡촌-나주순으로 돌아보면 되고 나누어서 갈 경우 나주-장성-고창-무장순으로 돌아보거나 그 역순으로 돌아보되 올 때는 88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나주군청 안에는 금성토평비와 조선시대 나주객사인 금성관이 있고 군청에서 30여m쯤 떨어진 금남동사무소옆에는 당시 싸운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정수루가 남아있으며 정수루 뒤에는 당시 나주목사의 관사가 남아있다.

금성토평비는 농민군에 항거한 나주 관군의 활약상을 기록한 비문이고 나주관사는 전봉준과 나주목사 민종렬이 비밀회담을 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전봉준은 이 자리에서 호남에서 집강소 농민통치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나주에서도 집강소를 설치할 것을 종용했으나 민종렬의 거부로 실패했다.이 인근에는 곰탕골목이라 할 정도로 곰탕전문 식당이 많은데 TV에 소개된적이 있는 한 식당에는 이 식당 특유의 담백하고 얼큰한 곰탕으로 점심식사를 하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주에서 다시 광주로 올라와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30분 정도 달리면 장성이나온다. 장성은 전봉준의 농민군과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이 싸워 농민군이대승을 거둔 황룡촌 전투로 알려진 곳이다.

장성 인터체인지에서 신호리쪽으로 가다 보면 월평장터가 있다. 당시 월평장에서 점심을 먹던 농민군은 경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곧 전열을 정비, 경군을물리쳤다.

이 싸움에서 경군의 이학승이 용감하게 단기로 농민군 진영에 뛰어들어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는데 그를 기리는 {이학승 순의비}가 신호리 신촌부락 뒤편 포도밭 지역에 서 있다. 순의비 근처에는 돼지 농장과 잡초가 우거져 돌보는 사람이 없는 듯 쓸쓸함이 짙게 배어있다.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에는 농촌지역에 다소 어울리지 않게 지난해 4월 만들어진 {해주하이츠}라는 15층 고층아파트가 서 있는데 이 아파트 옥상에서 보면 옛날 농민군이 말을 몰며 전투하던 월선봉과 재봉산,황룡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장성에서 다시 30여분쯤 차를 타고 고창쪽에 도착하면 고창읍성이 보인다.이 성은 일명 모양성이라고도 하는데 견고하게 만들어진 성에는 행락객들이한가롭게 거닐고 있다.

성 입구에는 농민군이 불태웠다는 은대정의 집터와 그 건너편에 조선말의 국악인 신재효가 후배들을 양성하던 집과 동리국악원이 위치해 있어 이 지역의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고창에서 무장쪽으로 가다보면 전봉준이 태어났다는 죽림리 당촌마을이 나타난다. 지금은 밭으로 변해 있는 고창읍 죽림리 당촌 56번지가 전봉준의 생가가 있던 곳이고 전봉준의 부친인 전창혁이 서당을 지어 아이들을 가르쳤다는서당터도 남아 있다.

고창에서 13km 떨어진 무장은 농민군이 본격적 기병을 한 곳이다.당시 무장관아의 정문이었던 진무루를 거쳐 들어가면 복원되어 있는 무장객사가 오른쪽에 있고 50여m쯤 더 걸어들어가면 무장국교가 있으며 학교건물 뒤쪽에 동헌이 자리잡고 있다.

무장에서 고창쪽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있는 선운사에도 동학농민전쟁과 관련된 장소가 있다. 선운사 산중의 절벽에 새겨진 석불에는 특이하게 명치부근에홈이 파져 있다. 농민전쟁 당시 그 안에 있는 비결을 얻으면 민심을 얻을 것이라하여 농민군 지도자 손화중이 비결을 빼내 민심을 얻게 됐다는 이야기가전해오고 있다.

전라도 지역의 농민전쟁은 이후 경남 하동,경북 예천,충청,황해도 지방으로번져나갔고 1894년 12월 농민군 지도자들이 차례로 잡힘으로써 끝이 났지만전라도 지역 곳곳에는 인걸은 가고 없어도 의구한 산천과 흔적은 남아 찾아오는 후세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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