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의 시위군중들에 대한 피의 진압이 있은 후 5천만명의 당원을 포용한중국공산당은 곧 이의 수습에 나섰다.즉 정치적으로는 내부 사상교육의 강화, 경제적으로는 이른바 치리정돈으로불리는 인플레의 수속, 금융질서의 확립, 방만한 경제질서의 부분 재편등에나섰으며 대외관계에서는 후유증 처리에 당.정이 구분없이 뛰었다.미국을 축으로 한 전세계가 중국민주화운동을 무자비하게 짓이겨 놓은 중국정권의 비인도성을 연일 규탄했으며 이에 따른 각종 제재조치가 속속 발표,중국정권의 존립바탕을 도덕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던 것.
여기에다 사건직후 숱한 외국인들의 도움으로 중국을 어렵게 빠져나간 민주인사들의 활동까지 가세돼 중국은 그야말로 {호떡집의 불}을 연상케 했다.5년이 지나는 동안 중국경제는 마침내 긴 터널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지만민중들의 사고 패턴은 고삐를 쥐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양해 졌으며 사회적인모순은 갈수록 복잡성을 더해가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외교분야가 이룩한 성과는 괄목할만한 것이었다.천안문사태로 인한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났을뿐 아니라 오히려 천안문 이전보다 더욱 강화된 입지로 미국과 강경대립 국면까지 연출하게 된 것이다.이기간동안 동유럽을 비롯한 소련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외부요인이 크게가세된 것은 물론이다.
89년여름, 계엄군이 북경 외곽을 채 빠져나오기도 전, 중국은 관광, 혹은 세미나참석등을 명분으로 홍콩과 미국인들을 대거 초청, 외교고립에서 벗어나기위한 내부시동을 건 것이다.
중국은 미국이 여론에 의해 움직여지는 다원화된 사회라는 사실을 미국의 클린턴행정부의 관료보다 더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며칠전 클린턴 미대통령이 중국에 최혜국대우(MFN)조치 연장을 발표하면서인권과의 연계정책 포기를 밝혔을때 정작 북경은 놀라지도 않았다.요컨대 당연한 귀결이란 것.
미국의 전통적인 인권정책조차 중국의 시장앞에 힘을 못 쓰는 판국에 프랑스,영국, 독일, 일본등이 삿대질을 할 여유가 있을리 없다.
중국외교의 사령탑인 전그침부총리겸 외교부장은 이렇게 중국의 경제를 바탕으로 선진국들의 각개격파와 동시, 전방위 방문외교를 펼쳐 나갔다.천안문사태의 다음해인 90년 한해동안 강택민은 북한을, 오학겸은 아프리카를, 만리는 서남아시아를, 양상곤은 남미를, 이철영은 일본을, 이붕은 동남아를 각각 순방, 세계를 휘젓고 다니면서 중국의 외교고립 타개는 물론 그들의영향력을 부식함으로써 91년에는 천안문사건으로 빚어진 국제문제를 기본적으로 해결한 것으로 북경의 외교가는 해석하고 있다.
중국이 천안문사건으로 외교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칠때 입버릇처럼 외고 다닌것이 이른바 부칭패, 즉 패권주의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황화논을 들고 나온 서구인들에게 이 부칭패는 세계를 안심시키기에 더 없이좋은 수사가 됐지만 이제 외교고립에서 벗어난 중국은 같은 수법으로 이 부칭패의 이론 아래서 경제와 군사력의 대폭증강을 꾀해 미국과 대등한 관계설정에 여념이 없다.
이제 중국에는 연간 평균 13%의 쾌속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신대국주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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