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기홍칼럼-오! 김성혁선생

사도의 본, 정의와 사랑의 실천자 고 김성혁 선생은 기념비적 인물이다. 김교수에게 영어를 배운 분들이 모이면 이구동성으로 그의 명강의를 회고한다.경북대학 교정에서 당시 미국의 평화봉사단 청년들을 만나면 그는 교재를 펴들고 마치 옛날의 소크라테스처럼 서서 토론하시던 장면을 나는 기억한다.**이웃위한 생애**그는 1948년 경북대학에 부임했다. 어학 교수였으나 기회만 있으면 진리에대해 가르쳤다. 그는 대학 강단에서 가르치신 한편 사저에서도 야간에 영어를가르쳤다. 야학에서는 명목상의 교습료만 받았고 그 전액은 자선사업에 쓰여졌다. 그의 가정은 생계를 잇는 선에서 유지하고 봉급 기타 수입의 대부분을장학, 교회, 농촌, 자립지원, 나환자등을 위해 썼다.

그는 {하늘나라를 위하여}라는 그의 지출수첩의 표제 그대로 하늘나라 곧 사랑의 나라 건설을 위해 그때 그때 돈이 생기는대로 전액을 가난한 이웃에게투자했다. 그는 극도의 내핍생활을 했으며 자기를 위해서는 돈을 쓰지 않았다.그는 참으로 성자의 생애를 보낸 분이다.

**애국애족 일관**

{올바른 성서관}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이성적이고 앞선 종교관 때문에 오히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또 그는 당시 정계의 불의와 부정에 항거하고 꾸짖는 예언자의 사명을 다했으므로 일생을 요시찰인물로 살았다. 그는 약관 이십대에 반일분자라는 죄목으로 감옥을 살았고 줄곧 애국애족으로 일관했다. 1960년 저 악명 높은 3.15부정선거가 있은뒤 4.19 데모가 일어났을 때에는 김교수는 데모에 앞장섰다. 그는 용감하게도 {부정선거로 된 정권을 인정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경북대 학보에 실었다. 이 글에서 그는 왜 현정권이부패했는가 하는 질문에 내가 남보다 잘 살아야겠다는 이기심 때문이라 말하고 지도자는 희생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명언했다. 이러한 바른 견해가 있어서거기서 그의 실천이 나왔던 것이다.

박정희정권 말기였던 1977년 교수들의 이중직을 금하는 정부 방침이 섰을 때그것은 반정부적인 김교수에게 제재를 가할 호재였다. 총장은 같은 영문과교수 출신이었으므로 그가 돈을 벌기 위해서 야간 과외수업을 하는 것이 아니며따라서 이중직이라 할 수 없음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교수는 교수직과 야학 둘중 하나를 포기하라는 다그침을 받았고 그는 단호히 교수직은 직업이지만 야학은 나의 종교활동이다하고 교수직을 포기했다. 그는 예나 다름없이 도보로 삼덕동 자택과 대학을 왕래했으나 신분은 시간강사였다.그는 1986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간질환이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의 간장을 태운 시국과 사회가 원망스럽게 느껴졌고 그이야말로 순교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그를 편협하다고 평했으나 만일 정의가 우세한 사회였다면 그의 동조자가 더 많았을 것이다.

**정의가 우세했으면**

그이를 외톨이로 만든, 참으로 문제가 있는 사회가 아니던가? 병색이 완연했을때 그는 내 연구실에 자주 들리셨다. 내왕이 없던 분이 말년에 사람들을가까이하고 싶었던 것은 그의 지독한 고독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를 그토록고독하게 만든 이 민족이었지만 동시에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민족이다! 모두가 가난했던 지난날 그의 원조를 받은 사람들은 부지기수이다.그는 그들에게 언젠가는 갚아라고 당부했고 그래서 사랑이 순환되기를 바랐다. 그 유지에따라 그의 제자들이 {김성혁선생 기념사업회}를 이룩하자는 뜻을 가지고 왔으므로 필자는 이 갸륵한 소식을 널리 전하고자 한다. 뜻이 있는 분들의 참여와 후원 있으시기를 바란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