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부터 김일성주석의 개인통역으로 한국전쟁이 끝난후에는 체코대사,동독대사를 거쳐 1960년까지 북한 외교부부부장(외무차관)을 지낸 박길룡옹(74)은 이번 김주석사망에 따른 북의 향후전망, 그리고 김영주, 김정일등 가족관계에 대해본지에 소상하게 그의 견해를 밝혔다. 김주석은 6.25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많은 죄악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는반세기동안 북한의 지도자로서 스탈린, 모택동과 같은 동등한 위치에 놓여있는 역사적 인물이다.나는 60년초까지 김주석의 그림자처럼 그의 곁에서 맴돌았으며 항상 낚시,사냥등 여가때는 나를 불러 동행시키곤 했다. 이때문에 나는 다른사람들처럼숙청당하거나 북을 도망쳐 러시아에 살고 있는 처지가 아닌, 60년초 당시 내가 외교부차관으로 있을때 정식 김주석으로부터 특별배려하에 모스크바 고급당학교 3년코스를 이수토록 허가를 받아 모스크바로 오게 된 것이다.또 그의 개인통역이었으므로 과거 남침이 이루어진 내용하며 김주석가족관계등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소상하게 아는 편이다. 김주석은 다시말해 숱한 사람을 숙청했고 악한 일을 행했지만, 그의 생활은 소탈했고 겸허한 면이 많았다.건강은 항상 좋았고 실지 경험도 다방면으로 아는게 많았다.내가 알기에 김주석에 대해 그릇된 부분이 많이 있다. 과장되거나 또는 허위로 채워져 있는 서적들도 많이 봤다. 언젠가 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나는 해방후 소련군정당시 소련제1군단 사령부 내에 행정직을 맡아보며, 조소문화협회(회장 이기영)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내가 알마아타 사범대학에서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이유로 초창기에는 실상 문학 부분에 관심이 컸다. 그러나 김주석이 도와달라는 바람에 개인전문통역을 맡아 외국손님접견을 담당했으며, 구라파에도 함께 동행을 하게되는 입장이 됐다.
다시 얘기를 해방후로 돌리자. 이때 평양의 김주석이 거처하는 집을 {5호주택}이라고 불렀으며 나는 김책, 최용건과 자주 놀러 다녔다. 그러나 1948년김주석에게 하나의 사적인 큰 사건이 발생했다.
**무조건적 사랑받아**
둘째아들 슈라(당시 김정일은 유라라고 불리웠음. 이는 그들이 소련 영토인하바로프스크에서 태어났기 때문임)가 더운 여름날 평양 분수에 빠져 익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음해에는 부인 김정숙도 임신한 몸인채 여름 세상을떠났다. 김주석은 이때부터 김정일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게 됐고 김주석이 새부인 김성애를 맞게 되자 김정일은 계모에 대한 반감이 싹트기 시작했다.김정일은 계모에 대해 심지어 저여자때문에 내 엄마가 죽었다는 소리를 할정도로 싫어했으며 성격은 제멋대로 하고 싶은대로 다 하면서 성장했다. 그가김일성 종합대학 경제학부에 다닐 무렵, 공부보다는 오토바이나 자동차를 몰고다니는 그를 보고 한 간부학생이 아버지를 본받아야 한다. 너는 아버지의신발짝도 안된다고 비판하자 다음날 그 학생가족전체를 어디론가 사라지게한사건이 동기들에게 아직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나는 그가 김주석과 함께 공산당 청년동맹(콤소몰)초청으로 1957년 모스크바에 왔을때 안내를 하며 유학을 하지 않겠느냐고 권하자 우리 집안에는 한사람이면 족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 한사람이란 김주석 동생인 김영주로 그는모스크바국립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유학생동지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모스크바에 와서 자동차, 오토바이 상점만 찾아 다녔다. 그는 특히비행기등 기계류에 관심을 가졌으나 대인관계에 있어 온순하거나 겸손한것과는 정말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실상 말을 해야할 자리에선 김정일은 이때까지 한번도 연설등을 해본적이 없다. 그의 이름으로 책을 많이 발간했지만 그건 누가 대신 해준것으로안다. 여하튼 그는 간단한 축배를 드는 자리에서도 인사말조차 하는 것을 본일이 없고 또 그러한 얘기를 들어왔다.
내가 판단하건대 김정일의 이러한 성격, 능력등을 종합하건대 북한 주요 3요직을 전부 담당하기란 무리라고 본다. 당분간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최소 주석자리는 삼촌인 김영주가 적임자라고 판단된다.
**김영주의 수모**
김영주는 현재 72세이나 김정일을 돕기위해 마지막 힘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사람일을 알수 없고, 그가 과연 김정일을 솔선수범 사심없이 협조할것인가도 장담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가 한때 김주석의 후임자로 이름이 나있던 52년에 김정일및 그 측근의 강한 반발로 중앙당에서 내보내져 오랫동안한직에서 지낸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정상회담 어려워져**
이번 김주석의 사망으로 인해 우리나라 통일은 더 쉬워진 것으로 얘기하는사람들도 있는데 내 의견은 이와 정 반대이다. 김주석 조문광경을 보았겠지만주민들이 훌리는 눈물은 대부분 마음에서 우러나온 울음이다. 예정됐던 정상회담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아지는 것은 현재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북한은 김정일을 당연히 내세울 것이나 그 내부적인 갈등을 우리는 쉽게 간과해서는 안된다. 집안끼리 절대 반목상태에 있는 계모 김성애 자녀들인 김평일, 김영일, 김경진등이 김정일보다는 훨씬 똑똑하고 공부를 많이 했다. 김영일은 핵 물리학자이며 딸 김경진도 모스크바에 유학한 경험이 있다.또 현재 군대에서도 김정일에 대해선 인기가 없다. 총참모장인 최광도 한때보위부장하다 쫓겨난 적이 있다. 5차 당대회때 비판을 받아 지방에 내려 갔다가 제6차 당대회때 다시 중앙위원이 됐다. 지난 92년까지 모스크바 군대아카데미에서 공부하던 수십명의 군인들이 전부 소환돼 중간 공부를 포기한채북한으로송환된 적이 있다. 그가 현재 국방위원장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북한권력배분이 생각처럼 쉽게 풀릴 것 같지는 않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내적으로는 폭탄을 안고 있는 상태일 것이다. 우선 장례일자를 연기한 것이 그 징후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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