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간데스크-소군정 3년의 미로

**소중한 력사기록**모스크바 송광호특파원으로부터 한가방이나 되는 {소군정3년}의 사진뭉치를받아 든 것은 지난달 말이었다.

역사의 증인이 될 귀중한 자료들을 입수했다는 연락을 받은 즉시 DHL로 부치지도 말고 직접 가지고 귀국하게 한 것인데 그가 가지고 온 커다란 앨범집1권을 비롯한 2백40여장의 사진들은 모스크바왕복 항공비 1천6백달러와는 비교도안될만큼 소중한 역사의 기록들이었다.

그도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해방이후 역사에 있어서 우리들은 {미군정}이란단어는 스스럼없이 쓰면서도 {소군정}이란 말은 어딘지 모르게 생소하게 느낄 정도로 장막속에 감추어져 있어왔고 그 때문에 일부 운동권들은 곧잘 미군은 주둔군이고 소군은 해방군이란 억지 논리를 펴 왔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근 반세기만에 공개된 사진 한장한장에는 어디에도 해방군으로서의소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를 가나 그들은 상석이었고 김일성을 비롯한 항일 빨치산출신은 물론 연안파 남북국나파 할것없이 모두에게 군림하는 {감시군}이었다.

정치집회는 말할것도 없고 웃통을 벗어제친 흥겹게 놀고 있는 야유회에서,금강산 유람에서, 술좌석과 뱃놀이와 낚시터에서 조차 그들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참으로 당혹스러운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상당수의 사진들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는 장면인지를 알수없는 것이었다.**김일성행적 생생히**

물론 레베데프사령관의 기록의식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그 바쁜 일정속에도 많은 사진뒷면에 러시아어로 설명을 해놓았다. 비록 {김일성}을 {김일센}으로 표기하고 같은 {금강산}지명을 원음에 가까운 {금강센}으로 했다가 {알마즈니(금강석) 가라(산)}로 의역하는등의 혼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대와 날짜표시가 명확해서 역사적 사실과 추론해보면 거의가 설명이 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진설명들을 쓰면서도 섬뜩함을 느낄수 밖에 없었던 것은 김일성과 오진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진속 주인공들은 곧 숙청되었거나 사형되었거나 러시아와 중국땅으로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고 더러는 자신들이 저지른동족상잔의 전쟁속에 죽기도 했다는 사실이었다.

**{박정애신화}도확인**

권력의 비정함을 논하기전에 백보양보해서 그들의 주장대로 {인민의 지상낙원}을 실현하기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한들 어제까지 생사고락을 같이 한동지를 처단하고 내짠고 전쟁의 잿더미속에 밀어넣으면서까지 핏자국으로 점철된 역사를 만든 사실은 언젠가 심판을 받아야 할것이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말로만 듣던 {박정애신화}의 확인이었다. 남편격이었던 북조선공산당분국책임비서 김용범과 함께 친소파의 자웅을 겨뤘던 박정애는 일찍이 녀맹위원장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북조선 신민당의 김두봉과 북조선 공산당 김일성이 합당을 할때 적극적으로 소군정의 입장을 대변했음을합당대회때의 사진에서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이념의 실현을 위해 부인이 있는 김용범의 가정을 파탄시킨뒤스스로 첩이 되었고 위암을 앓던 김용범의 건강이 악화되자 김일성에게 책임비서자리를 양위하도록 종용했으며 끝내 김용범이 숨을 거둘때에도 지아비의간병보다는 여맹위원장으로서의 정치활동에 더 비중을 뒀었다.이러한 {과업}들로 그녀는 숱한 숙청의 회오리속에서도 거뜬히 견디며 지난87년 사망할때까지 당과 최고인민회의의 요직을 두루거쳤는지 알수 없으나한여성으로서의 그녀의 일생은 또다른 평가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소군정3년}의 내막을 단9회의 사진연재로 끝막음 하기엔 사실 미진한감도없지 않다. 그러나 그 9회밖에 안되는 사진의 현장을 설명하는데도 각종자료와 정보의 한계성때문에 미노찾기보다 더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그 미노찾기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역사의 의무는 진실과 허위, 확실과 불확실, 의문과 부인을 분명히 구별하는데 있다}는 말을 믿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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