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설-타인의 시간(31)

은유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약국을 경영하는 부부약사다. 그래서 은유의 집에는 가정부가 있다. 나는 그 가정부 때문에 은유의 집에 잘 놀러가지 않는다.은유의 먼 친척뻘 되는 오십대의 늙은 아줌마인데 성질이 얼마나 이악하고다랍던지 볼수록 정나미가 떨어진다.한번은 은유가 투-언리미티드의 콤팩트 디스크를 샀다고 자랑하길래 따라간적이 있었다. 응접실에서 좀 크게 오디오의 볼륨을 높여 {트와이라이트 존}을 듣고 있는데 마침 시장 갔다 들어온 그 아줌마가 집 무너지겠다고 노골적으로 나무라는 통에 얼마나 무안하던지. 나는 그 아줌마의 행티를 보면, 나는 늙으면 절대로 저 아주머니처럼 되지는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곤 했다.그러나 은유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척 자상하시다. 나를 보면 꼭 친딸처럼대하고 귀여워해 주신다.은유에겐 남동생이 하나 있다. 은유와 열살 터울인걔 는 꼭 {나 홀로 집에}에 나오는 맥컬리 컬킨처럼 생겼는데, 은하라는이름처럼 행동도 참 귀엽다. 걔는 나만 보면 다랑귀 뛰고 싶어 안달을 낸다.어쩌다 은유가 내게 전화를 하면 제 누나의 등에 붙어 전화를 바꿔 달라고칭얼대는 소리를 전화기 속으로 선연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만일 먼훗날아기를 낳는다면 은하 같은 애를 낳고 싶다는 생각을, 나는 걔를 보면 징그럽게도 가슴속에 품곤 했다.

화장실로 들어간 작은 오빠가 샤워를 하는지 오래도록 나오지 않고 있었다.저렇게 여유를 부리는 걸 보니 아버지는 주무시는가 보았다.나는 혹시나 해서 물 묻은 손을 닦고 안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아닌게아니라아버지는 어린애처럼 넉장거리로 누워 입김을 뿌우뿌우 불며 저승잠을 주무시고 계셨다. 아침에 학교에 갈 때는 아버지의 턱수염이 검승히 웃자라 있었는데 작은오빠가 면도를 해주었는지 깨끗하게 깎여 있었다. 나는 비뚤어진 아버지의 베개를 바로 고쳐 주고 안방을 나왔다. 지금은 아버지로서의 품위나권위, 역할까지 다 잃어버린 상태이지만 그래도 저렇게 살아 계신다는 그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에겐 큰 위안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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