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설-타인의 시간(41)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의 말씀이 일일이 맞는 것 같았다. 저토록 우리들에게 모진 실망을 주고 있지 않는가. 남은 우리들을 위해서라도 더욱 당당하고 의젓해야 할 아버지가 말이다. 차라리 뒤바뀌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지는것은 아버지에 대한 불효가 될까.[광우는 늬 형이 아니다]

아버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작은오빠의 간절한 꼬드김에 아버지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모양이었다.큰오빠와 다툼이 있고 난 뒤부터 아버지는 꼭녹두죽을 받아 잡수실 때마다 큰오빠를 욕하곤 했다. 그리곤 꺼벙한 눈을 슴벅거리며 웅얼웅얼 씹어 삼키시곤 했다.

[알았어요. 또요]

작은오빠가 버릇처럼 눙치고 있었다.

[그놈은 우리 집 원수다]

[알았대도요]

[그놈은 우리집을 망칠 놈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빙그르르 돌았다. 그대로 눌러 있으면 감당할 수 없는울음이 솟구칠 것 같아 나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잘깎은 사과 조각 같은 달이 걸려 있었고 담장을 넘어 들어온 밤 바람이 부드럽게 겨드랑이를 간질이고 있었다. 푸지고 웅숭깊은 밤이었다.나는 이층 옥상으로 올라가 볼까 하다가 그것도 시뜻해져 현관 앞 계단에 옹송그리고 앉았다.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어둠과 적막 속에 묻혀 있었다.전에 살던 주희가 곧잘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오르던 행복의 계단이었다. 걔의 남동생 철희가 급하게 내려오다가 엎어져 턱에 팥을 간 추억의 계단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별식을 하면 내가 그것을 쟁반에 담아 들고 조작조작 올라가던 따뜻한 계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그 계단은, 어쩌면 영원히 그런 아름다운추억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주희 엄마는 참 마음씨가 좋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전해 듣고 제일 먼저 달려와 우리와 함께 울어 준 사람이 바로 주희 엄마였다. 장례 기간 동안 제 일처럼 도와 준 고마운 분이기도 했다. 주희네 가족이 이사가던 날, 나는 얼마나 능준한 슬픔에 잠겼던가.

불현듯 주희 가족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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