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설-타인의 시간(59)

아무나 붙들고 실컷 얘기라도 해보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명치 끝을 치받치고 있는 어두운 것들을 말끔히 씻어내리고 싶었다. 아버지도 그런 기분일까.나는 내의를 찾아들고 화장실로 갔다. 온몸이 빨갛게 얼도록 알알한 찬물을끼얹으면 초조하고 갑갑한 기분은 좀 가라앉을 것 같았다. 나는 거울을 보면서 찬찬히 옷을 벗었다. 우리 집을 에두르고 있는 슬픔의 껍질도 이렇게 벗길 수만 있다면,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이런 모습으로 채찍 휘감기는 팽이가되어도 좋다고도 생각했다. 살갗이 찢겨 철철 피를 흘리며 팽글팽글 돈들 이보다 더 암담하지는 않을 터였다.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꼼꼼히 들여다 보았다. 도무지 나 같지 않은 낯선 몸뚱이 하나가 그 속에 슬프게 박혀 있었다. 보석처럼 빛나던 눈, 생기 발랄하던 뺨, 붉고 촉촉하던 입술은 그 어디에도 느낄 수 없었다. 새하얀 가슴을 헤적이면 꺼먼 피멍이 점점이 뿌려져 있을 것 같은 참혹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가만히 거울을 훔쳤다. 그래도 거울속의 내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욕탕 속으로 들어갔다. 샤워배스의 손잡이를 틀자 촘촘한 구멍 속에서쏟아진 세찬 물줄기가 순식간에 내 몸을 적셨다. 나는 오래도록 물줄기 밑에서 있었다. 아버지의 의식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흐느끼듯 서 있었다.[안에 있니?]

물줄기를 줄이고 온몸에 마프러스를 칠하고 있을 때 문 밖에서 작은오빠가나를 찾고 있었다.

[왜 그래?]

[물 어디 있니? 냉장고에는 없어]

[베란다에 가봐. 압력 밥솥에 있을 거야. 식히려고 거기 내놨어]작은오빠가 말없이 문 앞에서 멀어졌다. 나는 서둘러 거품을 씻어내렸다. 씻고 나니 한결 기분이 개운했다. 거울 앞에서 물기를 닦고 있을 때, 전화벨이꿈결처럼 아득히 울렸다.

[아버지, 그만하시고 입 벌리세요]

작은오빠가 아버지에게 안정제를 먹이는 모양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애원하는 듯한 작은오빠의 다그침이 전화벨 사이로 나직이 깔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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