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타인의 시간(70)

그런 일 하나 올곧게 추리지 못하면서 왜 사랑은 했을까. 결국 그도 그런 그릇이었던가. 고통이나 역경 따윈 눈꼽만큼도 담아낼 수 없는 앤생이 같은 그릇. 다시 형부될 사람의 모습이 아프게 다가왔다. 사람에 대한 느낌이 하룻밤사이에 그렇게 달라져 보일 수 있을까. 가끔 내가 전화를 받으면 보고 싶다는 둥 또 놀러 오라는 둥 너스레도 잘 떨던 그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진정으로 언니를 사랑했다면 왜 투쟁하지 못하는가. 오르페우스는 사랑을 위하여 사선까지 넘지 않았던가. 왜 오르페우스가 되지 못하는 걸까.나는 울고 싶어졌다.은유가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얼마 전에도 은유가 물었었다.

승희언니 언제쯤 결혼하느냐고.그때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아버지의건강이 회복되는대로 곧 하게 될 거라고. 그땐 네가 꼭 웨딩마치를 쳐 달라고. 언니도 무척 좋아하더라고. 내 말을 듣고 은유는 으쓱했었다.이제 그 은유가 다시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갑자기 결혼할 수 없게 되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면 은유는 이해할 수 있을까. 먼훗날 은유가 작은오빠를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 결혼 얘기가 나오면 은유 엄마도 어머니의 일을 들어 반대하시지 않을까. 그때 은유는 어떤 행동을 보일까. 가방을 멘 나의 어깨가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소소리바람만 불어도 내 몸은 소용돌이에 휩싸여 아득히 솟구칠 것만 같았다. 이대로 내처 어디론가 마냥 걷고 싶어졌다.접때 토요일처럼 삭신의 마디가 풀릴때까지 다리품을 팔면 근육처럼 뭉쳐 있는 이 기분은 좀 나아질까. 은유를 만나면 전에 가 보지 못한 모리셔스에 가보자고 그럴까. 내가 막연히 동경했던 도도의 땅, 모리셔스. 느닷없이 내가제의하면 은유는 놀라 소리칠 것이다.

[너 미쳤니?]

그리고 은유는 내 손을 꽉 붙잡고 또 따질 것이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그런 면에서 은유는 아주 집요하다. 나는 은유의 끈질긴 추궁에 넌더리가 나 마침내 언니 일을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은유는 이해할 수 있을까,그의 행위를. 다시 한 번 붉은 태양이 보고 싶어진다. 우리의 지친 발걸음을 묶었던 황홀한 저녁 풍경. 어쩌면 그때 우리는 도도의 난나를 보았던 건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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