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호소카와 모리히로(세천호희)전총리의 일본신당이 30일 처음이자 마지막 당대회를 열고 {해당}을 결의했다. 이날 당대회는{신신당 참가를 위한 해당안}과 {당재산처분안}을 일사천리로 결의하고 신신당출범 하루전인 12월9일자로 정식해산키로 결정했다.참의원의원이던 호소카와시가 마치 동키호테 처럼 홀홀단신 정당을 결성한후,불과 2년만에 무려 38년간이나 계속되던 자민당정권 종식에 결정적 역할을했던 일본신당은 안팎의 환경에 적응치 못하고 마침내 {반짝 정당}으로 막을내리게 됐다. 일본의 정치풍토에서 신당이 발붙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대변해주는 사례로도 기록될 것이라는 시각들이다.
지난92년 5월 개혁을 기치로 창당한 일본신당은 2개월뒤 실시된 참의원선거에서 일거에 4명이 당선, 40년 가까이 무풍지대이던 정계에 {참신태풍}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가네마루(김환신)사건으로 불거져 나온 정계의 부패상이 자민당정권에 타격을 가해, 정계가 격변에 휩싸인 93년 7월 총선에서는 무려 38명이 당선, 자민당 몰락의 결정적 펀치를 날렸다. 그 공로로 연립정권의초대 총리에 호소카와대표가 발탁돼 불과2년만에 정권중심에 올라서는 약진을 과시했다.
그러나 단기간의 도약은 빠른 실망감을 안겼다. 정치경험이 짧은 호소카와총리의 지도력 결핍, 연립내 내분등으로 간판처럼 내건 {개혁}이 뒤뚱거리고,엎친데 덮친 격으로 호소카와총리 개인의 비리, 즉 사가와규빈(좌천급변)금전의혹이 터져 인기는 급전직하의 내리막을 달렸다. 총리사임후 7명이 당을떠나는등, 일본신당 자체의 존재의미가 없어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재정적운영과 당인기등 모두를 호소카와대표 한사람에 의존한 일본신당은 호소카와의 부심과 운명을 같이 하며, 정계재편의 와중에서 설자리를 잃고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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