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타인의시간-바나나가 있는 풍경⑮

뜻밖에도 언니는 이층에 나와 있었다.팔짱을 낀 채 이따금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조용히 바장이는 모습이 얼핏 어머니의 옛 모습을 떠올려 주었다.어머니도 가끔 우리가 학교에서 늦게 돌아오면 집 앞에서 그런 모습으로 서성이시곤 했다.[언니,바나나]

나는 집 가까이 다가갔을 때 비닐 봉지를 번쩍 들어보이며 밝은 목소리로 소리쳤다.그때야 나를 발견한 언니는 아래를 굽어보며 웬 거냐고 물었다.그러나 나는 은행으로 형부될 사람을 찾아갔었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나는 잰 걸음으로 대문을 들어섰다.언니가 천천히 이층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나는 언니 앞에 봉지를 활짝 열어보이며 "언니 주려고 샀어"하고 자랑하듯 종알거렸다.언니가 안을 들여다보더니 그 양에 놀랐는지 일순 입이 금붕어처럼 벌어졌다.

[너 미쳤니?]

언니가 반가워하기는 커녕 단단히 심사가 뒤틀린 표정으로 쥐어박았다. 난 그만덴겁해졌다.

[왜 그래,언니 난… …]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곳 같은 언니의 말이 쏟아졌다.

[너나 먹어.내가 언제 바나나 먹고 싶댔니]

언니가 시퍼런 걸음새로 현관 계단을 올라섰다.나는 잠시 멍해 있다가 뒤따라 들어갔다.뭔 일인가 싶어 안방에서 나오던 작은 오빠도 바나나를 보고 몹시 놀라는표정을 지었다.

[승혜야,너 왜 그랬니]

작은 오빠도 점잖게 나를 나무라고 있었다.나는 대꾸없이 작은방으로 들어갔다.팔베개를 한 언니는 창쪽으로 토라져 누워 있었다.나는 언니를 달래듯 부드럽게말했다.

[언니,일어나 봐.내가 다 말해 줄게]

[듣기 싫다,얘.우리가 지금 한가하게 바나나나 까먹고 있을 처지니]언니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그렇게 토라져 누워 있는 모습이 흡사 르누아르의 "해변에 누워 있는 욕녀"처럼 덜퍽져 보였다.나는 훨씬 성숙해진 듯한 언니의 가슴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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