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설 타인의 시간(100) 도도의 새벽

"내 말을 들어야 해. 이건 내 뜻이자 아빠 엄마의 뜻이기도 해. 광우도, 부산 고모도 찬성할 거야. 부산 내려가서 이쪽은 돌아보지도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는 거야. 그래서 꼭 꿈을 이뤄. 난 이제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아. 정진씨와 결별을 선언할 때 내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어. 차라리 잘된 거야.""언니, 고마워. 하지만 그건 안돼. 그럴 순 없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같이 사는 거야. 나도 이제 당당해질게.""그래도 내 말을 들어야 돼. 우리 집을 지키는 데는 광우하고 나하고 둘만으로도 족해."

"그렇지가 않아. 집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네 개의 기둥이 필요해. 난 여태까지 우리는 네 개의 기둥이고 아빠는 그 위에 얹힌 대들보라고 생각해 왔어.두 개의 기둥으로는 버틸 수가 없는 거야. 언니"

"그래도 내 말을 들어야 돼. 내 말 안 들으면 난 너를 죽여 버릴지도 몰라.알겠니?"

나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태도가 매우 강경했으므로 끝내 거부했다가는 밤을 새워야 할 것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나는 내심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 언니가 다시 나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언니가 곧 내 손을 잡은 채로 아주 평온하게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언니의 숨소리가 내 가슴속으로 밀고 들어와 내 것과 섞여 고운 음률을만들어내고 있었다. 만일 그 가락을 악보에 옮겨 연주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클래식이 되리라 믿었다.

주위는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현관 밖 나의 제비꽃이 밤이슬을 받아 먹고쏙쏙 자라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이 밤에 나처럼 자지 않고 의식이 열려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하다가 나는 아픔처럼 형부될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레스토랑에서 나의 정교한 악기를 감동적으로 연주해 주었던 사람. 만일 그가 이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그렇게 감동적으로 연주해 줄 수 있을지는 종시 의문이었다.

미래의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처럼 투명했던 나의 미래. 언제 누가물어도 스스럼없이 도화지위에 그려 보여줄 수 있었던 그 미래가 이제는 희미한 윤곽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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