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명한 어둠 위로 은유의 모습이 떠올랐다. 웃을 때 하얗게 드러나는 이가매력적이던 은유. 귀 밑에 점이 있고 손금이 선명했던 은유. 토요일 오후나일요일 낮,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무료한 시간을 샘물처럼 상쾌하게 길어 주었던 은유.-거기, 남승혜 학생 댁이신가요? 내가 전화를 받으면 가성으로, 은유는 그렇게 점잔을 뺀다. 그러면 나 역시 시치미를 뗀다. -그런데요. 전화하시는 분은 뉘신가요? -아 경찰입니다. 불법 과외한다는 정보가 들어와 뭣 좀 조사할게 있어 그러는데 잠시 엘로우 폴리스로 출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종음색 한번 안 변하고 능갈을 쳐대던 은유. 나는 다시 한 번 은유의 그 고운가성이 듣고 싶었다.
"거기, 박은유 학생 댁이신가요?"
나는 날이 밝는 대로 은유에게 그렇게 전화하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유에게 우정의 꽃을 바치고 언니가 형부될 사람에게 그랬던 것처럼어느 순간 결별을 선언하리라 생각했다. 처음 은유는 몹시 당황하고 충격을받겠지만 결국 나의 진심을 이해해주리라고 나는 확신했다. 만일 은유가 나의 결별을 받아 주는 조건으로 전에 가보지 못했던 도도의 땅 모리셔스에 가보자고 제의한다면 나는 흔쾌히 받아주리라. 다시는 붉은 태양, 아니 도도의환상 같은 건 볼 수 없겠지만.
나는 언니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살며시 이부자락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도 신경이 예민해진 것일까. 전 같으면 떠메고 가도 모를 만큼잠귀가 어두웠는데, 내가 조신히 몸을 일으켰음에도 언니는 놀라듯 몸을 뒤척였다. 악몽을 꾸는지 이맛살을 찌푸리고 입을 헤 벌리고 있었지만 이제는그것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나는 갓등을 올리고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초저녁에 펴 두었던 책들이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고, 연습장에는 침 묻어 말라붙은 흔적이 다듬잇살처럼 남아 있었다.
탁상 시계는 두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일기장을 꺼냈다. 그리고 오늘의날짜를 쓰고 엄숙한 마음으로 또박또박 빈 공간들을 메워 나가기 시작했다.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은 더욱 또랑또랑 맑아왔고, 나의 가슴은 반대로 뜨거워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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