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경제인-김추호 아세아 산업공사 회장

60년대 말에 겪은 3번째 위기는 엄청난 충격이었다.분무기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게된 김회장은 회사 창업후 10여년간의 노력끝에 일궈넣은 북구칠성동의 공장을 처분해야했다.당시 대구에서는 제일모직공장 다음으로 크다고 할 정도의 규모여서 충격이 클수밖에 없었다.김회장은 "다른것 하면서 머리를 식혀라"는 주위의 권고를 받아들여 공장을판돈으로 채무를 정리한후 농촌에 가서 양계를 할 생각을 했다.그러나 이제까지 자신이 해온 일은 농기계 생산이 전부인데 중도에 포기한다는 것이 도무지 마음에 차지않았다.

김회장은 70년대 초 북구노원동 제3공단에 공장부지를 마련하고 재기에 나섰다.장남 웅길씨를 불러들여 부사장을 맡기고 회사 일을 돕도록 했다.직원 10여명을 데리고 담장과 수위실을 먼저 만든후 공장일을 시작했다.예전에 아세아산업공사에서 일하다 독립,주물공장을 차린 사람을 부사장이직접 설계도면을 갖고 찾아가 주물을 만들게 하고 옛날 직원중 선반 공장을차린 사람에게는 가공을 부탁했다.몸으로 부닥치면서 일을 해나갔지만 농민들이 아세아산업공사 제품의 품질에 대해 갖고있는 믿음은 여전해 판매에는걱정이 없었다.

김회장이 50~60년대 농기계를 생산하면서 닦아놓은 명성은 아직도 식지않아아세아산업공사의 명함을 갖고 가면 전국 농촌 어디서나 인정해줬다.재기에 성공한 아세아산업공사는 농기계 보급확대에 힘입어 매출액이 급신장했다.

1976년 말 전국 농촌에는 동력분무기 4만5백여대 동력살분무기 6만4천여대가 보급되어있었는데 이중 아세아산업공사에서 공급한 물량이 52%나 되었다.76년 개발에 성공한 농업용 디젤엔진은 지금도 김회장이 자랑을 아끼지않는다.

농업용 디젤엔진은 경운기,양수기,분무기등 모든 농업기계의 원동력인데 아세아산업공사는 그전까지 일본에서 수입하거나 국내 업체들의 제품을 사다쓰는 형편이었다.

김회장의 아세아산업공사는 자체개발에 착수하면서 외국에서 쓰는 소재를 그대로 수입해 사용키로 했으나 일본에서 팔려고 들지않았다.대체 소재를 자체 개발해내자 이번에는 부품업체들이 납품을 안하려 했다.경쟁업체가 기존 부품업체들에 압력을 넣어 공급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때문에 협력업체를 직접 육성해 나갔는데 이들 협력업체는 향후 지역 기계공업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된다.

김회장은 회사가 재기에 성공하자 70년대 중반부터는 경영과 관련된 업무 대부분을 아들에게 맡기고 대외 활동폭을 넓히는데 힘을 쏟는다.대구상공회의소 의원과 경북기계공업조합 이사를 거친후 77년에는 한국농기구공업협동조합 이사장에 선임됐다.

이해 4월 동남아 경제사절단 단장으로 6개국을 순방하고 9월 대미 투자 유치단 단장,11월 일본농업기계 기술협의단 단장,78년에는 구미지역 시장조사단장으로 출국하는등 잇딴 해외 출장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게됐다.김회장의 바쁜 해외 나들이에 힘입어 국내 농기구업계의 해외수출액은 76년5백10만달러에 불과하던것이 79년에는 1천3백만달러로 2배 이상 늘어났다.그러나 70년대말이 되면서 아세아산업공사는 대동공업등 타 농기계업체들에밀려 경운기의 시장점유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80년대로 들어서면서는 국내경기 불황에다 정부의 강력한 물가정책으로 인해 타산이 맞지않아 금융비용이 엄청나게 커지게됐다.김회장의 아세아산업공사는 새로운 히트상품 개발만이 살길이라는 판단아래관리기 개발을 시작했다.

일본 제품을 수입 판매해봤지만 우리와는 다른 일본 토질에 적합한 제품이어서 판로를 넓히는데 실패했었다.

과학기술처와 공동으로 개발에 착수하면서 정보가 새 나갈까봐 공장안에서도시험않고 한겨울에 제주도로 시제품을 싣고가 테스트를 했다.제주도는 자갈밭이 많아 이곳서 성공하면 국내 농촌 어느곳에서도 무난히 쓸수있으리라는 판단때문이었다.4년이상의 노력끝에 개발에 성공했다.과학기술처에서는 '공동개발한 이 관리기는 우리 농정에 큰 기여를 할 것이분명하다'는 내용의 공문을 관계 부서에 보내 아세아관리기에의 정부지원을촉구했다.

그당시까지만 해도 농기계판매에는 국고보조금이 없었는데 아세아관리기는처음으로 20%의 국고보조금도 받게됐다.

기아자동차서 1t트럭 50대를 외상으로 구입해 관리기를 싣고 전국 농촌을 돌며 농민들에게 보여줬다. 기계가 지나가면서 땅파고 비료를 넣은뒤 다시 땅을 덮어놓으니 농민들이 놀랄수밖에 없었다. 국고보조금도 20%가 있어 관리기는 해가 갈수록 판매량이 급증,공장을 회생시키는 밑거름이 됐다.이때 개발된 아세아관리기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아세아농기계의 모습도 없었을지 모른다고 할 정도다. 또 이 아세아관리기는 노동집약적인 우리 농업에기계화 표준화를 도입,농업생산성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아세아산업공사의 성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것이 종교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김회장은 아세아산업공사를 창업해서 국내 굴지의 농기계 제조업체로 키워내기까지 회사경영에서도 기독교의 신앙생활을 빠트리지 않았다.부모때부터 독실한 기독교신자 집안이었던 김회장은 광복이 되자 1백마지기의 논 문서를 북성교회에 기탁,유지재단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6.25전쟁전에 대구신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대구에는 인가받은 신학교가 이곳뿐이었는데 김회장도 입학,1회 졸업생이 됐다.

아세아산업공사를 45년 9월 창업할때도 기독교 신앙생활을 회사에 접목시켰다. 김회장은 아침 조회전에 전 종업원이 모여 예배를 본후 작업을 시작토록했다. 공장 인근의 불우청소년과 무의탁 주민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일할수있는 사람은 공장에 취업시켰다.

교회에 다니지않으면 "일하러 온것이 아니고 사람되려고 공장에 오는것이다.일에 앞서 사람이 되라"며 교회에 나갈것을 적극 권유했다.대신 교회에 나가 1시간 예배를 보면 하루 일당을 줬다.

회사 표어도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먹지도 말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했다.일요일은 근무않는 아세아산업공사의 전통은 지금도 지켜져 주문 물량이 아무리 넘쳐도 일요일에는 공장을 돌리지않는다.

김회장은 회사 경영에 기독교정신을 도입한것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기독교 정신이 종업원들의 근면과 성실한 근무자세를 북돋웠으며,아세아산업공사 창업후 겪은 3차례의 위기를 무난히 넘기고 현재의 입지를굳히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믿는다.

아세아농기계와 경북 달성공단의 아세아종합기계는 지금도 국내 굴지의 대기업계열 농기계회사들과 경쟁을 벌이면서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자랑한다.관리기의 시장점유율은 80%,SS기는 70%나 된다.

요즘은 기계화농업에서 첨단 무인농업으로 우리 농업을 변화시키기위해 무인농기계 생산에 큰 힘을 쏟고있다.

2년전 무인SS기를 개발,전국 농촌을 돌며 현장시험을 하고있는데 내년부터는양산체제로 들어갈 계획이다.

지난 10월에는 KT마크도 획득했다.

김회장은 현업에서 손을 뗀 지금도 신규사업이나 중요한 설비투자 문제에 대해서는 그간의 풍부한 경험과 식견을 바탕으로 조언을 한다.기계공업 외길을 걸어오면서 보릿고개를 없애고 식량자급화에 일조를 했다는김회장의 자긍심은 지금도 여전한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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