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경제인-박재갑 갑을그룹 창업주

누님의 권고를 받아 포목상을 시작하기전부터 재갑씨가 이쪽에 관심을 가진것은 아니었다. 이미 만주에서 사업을 해본 경험이 있기때문에 업종을 섣불리 결정하지 않고있었다.재갑씨는 물건을 만진 다음에 손을 씻는 장사가 있고, 손을 먼저 씻고 물건을 만지는 장사가 있는데 이 둘을 놓고 고민을 하다 손을 먼저 씻고하는 장사를 택했다고한다. 손을 씻고 하는 장사는 당시로서는 포목과 종이 뿐이었다.

점포 반평에다 누님으로부터 사업밑천으로 받은 인평직물 20필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었다고 해서 장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인평직물이란 인조견직을 평직으로 짰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상여행렬에서 휘날리는 만장이 바로 이 직물이다. 당시 서문시장의 주 취급품목은 광목,본견,양단과 인평직물이었는데도 신설점포에는 손님이 없었다.텃세 센 서문시장에 단골없이 장사가 될리 만무했다.그야말로 개점휴업.

만주에서 정미소로 큰소리쳤던 재갑씨는 며칠동안 직물한필 팔리지않자 포목상을 그만두고 마산으로 내려가 다른 장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보다못한누님이 재갑씨가 자리를 비운 사이 신한상회 물건을 자신의 창고에 옮겨놓고물건을 팔았다며 돈을 주었다. 이런 연극을 눈치챈 재갑씨는 마침내 누님의정성에 감복,포목사업에 정열을 보였다.결국 2년만에 신한상회는 서문시장에서도 알아주는 포목상으로 성장하게된다.

당시 시장으로 볼때 포목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6.25직후 서문시장은 전국최대의 직물판매 집산지. 그야말로 없어서 못파는 시절이었다.새벽부터 전국에서 몰려든 소매상들로 장터는 항상 북적거렸다. 서문시장내상인만도 4천명에 달했다고하니 포목이외 품목은 자연히 주변으로 밀려날수밖에 없었다. 동산동일대에 소위 '실가게'가 형성돼 오늘날까지 내려오고있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때문이다.

이런 섬유호황기에 재갑씨는 서문시장에서 포목상을 했던것이다. 대신동집에다 가마솥을 걸어놓고 인평직물을 직접 염색하여 시장에 내놓았다. 가마솥염색원단이 좋을리 만무했다. 그러나 당시는 품질보다는 물량이 절대적으로달리던 시절. 52년 가을, 점포를 확장하고 근사한 창고도 마련하는 짜릿한기쁨을 맛보게된다.

전후 폐허상태,미군부대에서 쏟아져나온 외래품이 교동과 국제시장에서 판을치며 '도깨비 시장' '양키시장'으로 불리던 때에 재갑씨의 사업은 살이 붙기시작했다. 그의 노력과 행운의 타이밍이 멋지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4년동안 착실히 부를 축적한 재갑씨는 부산에 있는 신흥직물이 경영부실로 공장을내놓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공장을 찾아가보니 자카드 12대와 평직기12대가 있었다.

이를 구입해 대구 원대동 3천5백평 부지에 공장을 설립한것이 신한직물공장이다. 56년3월 갑을그룹을 잉태시킨 재갑씨의 첫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포목상이라는 단순유통에서 벗어나 직접 생산에 뛰어드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재갑씨 외에도 동국무역의 백욱기,남선직물의 윤경보,범삼공 홍재선,보국직물 정순용씨등이 직물생산 공장을 차려 대구 섬유업계의 선두주자로 나서게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사실 신한직물은 우연히 다가왔다. 당시 옷감만 있으면 돈을 벌던 시절이었으므로 직물제조업체들은 포목상들의 생사권을 쥐고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포목상들은 공장에 선금을 맡겨놓아야 물건을 받을수있었다. 그런데 바로 재갑씨가 거래하던 공장이 부도를 낸것이다. 채권확보를 위해서도 공장을 인수하는 것은 당연했다.

때마침 군복무를 마친 재을씨가 합류하면서 공장을 재정비,개인명의로 돼있던 것을 법인으로 전환하여 '신한견직 합명회사'로 간판을 내걸었다. '신한'이란 이름은 부친이 포항에서 경영하던 건어물상 이름이다.이전부터 재갑씨는 당시 대구육군본부에 근무하던 동생에게 빨리 제대해서 사업에 참여해줄것을 권했다. 그러나 재을씨의 유창한 외국어실력때문에 군은 56년12월까지재을씨를 붙잡아 놓았다. 그때까지 재을씨는 매일 퇴근후 형님공장에서 일손을 거들어주었다고 한다.

장교출신의 재을씨가 군에서 배운 경험을 토대로 본격적으로 신한에 참여하면서 사업은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재갑씨는 사장,재을씨는 부사장이었다.이들 형제의 사업은 아주 순조로웠다.

"자카드직기 12대를 갖고 시작한지 1년만에 기계가 24대로 늘어나데요. 다음해는 48대로,또 1년후에는 곱절로 늘어 4년쯤 지나니까 1백20대까지 늘어났어요" 박재을씨의 회고담이다. 자카드직기로 짜낸 무늬가 들어간 양단은 혼수감으로,여성옷감으로 불티나게 팔렸다. 옷감을 짤 실만 있으면 돈을 버는것은 시간문제였다.신한견직은 별로 거침없이 성장,59년에는 서울 태평양교역에서 쓰던 직기 50대를 새로 사들이고 염색시설도 늘려갔다.염색시설이 커지자 담장을 낀 보국과 굴뚝높이 경쟁을 할정도였다.높이 20m정도의 보국 굴뚝보다 한단계 높게 만들어 외형을 과시했더니 다음날 보국에서 당장 굴뚝을 헐고 신한보다 한단계 더 높였다는 얘기는 유명하다.60년대들어 '큐프라' 직물이 크게 히트하면서 자본이 축적되자 동생 재을씨는 서울로 진출,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된다. 큐프라 직물은 재을씨가 홍콩시장등지를 순회하면서 해외시장의 직물패턴을 보고와 착상한 것인데 피카소디자인같은 과감한 무늬의 직물이다. 61년 좀더 넓은 시장을 찾아 서울로 진출한 재을씨는 동대문시장에 점포를 내고 형이 대구공장에서 뽑아낸 직물을직접 팔기 시작했다. 이후 20년동안 갑을 형제는 대구와 서울로 나뉘어 생산과 판매를 분담,초석을 다져나갔다.

이렇게 두 형제는 마치 마차의 수레바퀴처럼 조화를 이루며 사업을 키워나갔으나 결국 '분가'의 길을 걷고만 갑을그룹의 오늘을 보면 창업세대와 차세대의 경영철학이 얼마나 다른지를 실감하게된다.

1965년 4월 안양에 있던 동국실업이 이들 형제 곁으로 왔다. 세계적인 염료메이커 산도스사 한국대리점을 겸한 동국실업은 당시 신한견직에도 염료를납품하고있는 무역회사였는데 갑을형제가 이 회사를 인수한 것이다. 바로 재갑씨가 첫번째로 인수한 회사다.

동국실업은 당시 성장을 위해 몸을 아끼지않던 이들 형제에게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존재였다. 무역회사인 동국실업을 통해 재을씨는 마음대로 외국을드나들수 있었고 이로인해 수출과 해외시장 정보의 중요성을 비교적 일찍 깨닫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동국실업은 76년 (주)갑을이 탄생할 때까지 재갑씨의 수출창구 역할을 톡톡히 하게된다.

이후 갑을그룹 '큰집'의 2세경영인 박창호회장이 어느 기업인보다 외국투자에 주력한 것도 수출에 일찌감치 눈뜬 창업세대의 선견지명과 맥을 같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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