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슬리퍼를 신고 잠시 어설프게 서 있다. 길모퉁이에 짐짝처럼 붙어있는구두 수선소에 굽을 갈아 달라고 부탁해놓고 서있는 참이다. 구두를 엎어 놓고 못을 치는 할아버지의 나무껍질같은 손등에 엷은 햇살이 어룽진다.잘 손질된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길을 걷는다. 새롭다. 헌 구두를 수선했으니 새 것처럼 신을 수 있다. 아니 헌 구두를 수선하니 새 구두가 되었다. 새구두, 새 것, 새로움….되돌아 볼 수밖에 없을만큼 와 버렸다. 나에게 예비되었던 모든 것을 써버리고 그 마지막 시간을 밟고 섰다. 날이 선 바람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간다.회한과 허무에 떤다.
무엇으로 내 허물을 덮을 것인가. 백설이라도 펑펑 쏟아졌으면 좋겠다. 하얗게 천지를 덮어서 모든 잘못을 잊을 수만 있다면… 하늘은 겨울 가뭄으로 카랑카랑하다.
이쯤에서 어지러이 흩어져간 시간들을 정리해 보고싶다. 하지만 정리하고 반성하는 것조차 이맘 때쯤이면 가져보는 상습적인 감상따위가 되지 않을까 머뭇거려진다.
내 허물의 실상은 무엇일까. 구세군 냄비가 등장하고 방송국에서 모금 운동이 펼쳐질 때에야 '불우'란 이름의 이웃이 문득 생각나는 이 무감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찢어지고 부서지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본 탓에 진실이란 것이 깡그리 소멸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나무토막같고 돌덩이 같은 나는 과연 살아 있는가. 살아있다면 기적이다. 나보다 훨씬 바르게 살아온 생명들이 무수히 떨어져간 오늘, 나는 생존해 있다. 살아남은 자의 몫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삶을 빚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 한 이웃, 병마에 신음중인 이, 소외받고 무시당하는 사람에게서 멀찍이 비켜서 서 따뜻하고 배부르다고 나는 행복해 한다.
다리가 무너져서 꽃같은 생명이 썩은 철근처럼 꺾여도, 아이인지 어른인지모를만큼 타버린 잿덩이가 나와도 그 누군가의 잘못이라고 흉만 잡았다. 당신 이 잘못했고, 당신이 정직하지 못했고….
그러니까 내 허물의 실체는 이기심과 생명에 대한 외경심의 상실이다. 진실은 언제나 내 마음이 편한 쪽으로만 논리가 정연하다. 모든 나쁜 결과에서나는 빠진다.
신문에 이름 석자를 뼈아프게 새기고 사라져간 사건, 사고의 희생자들을 며칠안에 잊어버린다. 생명의 소중함을 망각한 까닭이다. 겨울나무에 매달린쪼그라든 이파리 하나에도 물살지던 가슴이, 멀리 개짖는 소리에도 정겹게다가오던 생명에의 끈끈함이 어디론가 증발되었다.
10주된 태아의 발 사진을 보았다. 절대자의 섭리로 잉태된 생명을 그 부모가지워버린다고 한다.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것이 생명일 것이다. 생명은 선(善) 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위협해도 좋을만한 정당한 이유란 있을 수 없을터이 다. 생명경시의 풍조속에 길들여진 나는 그 존귀함을, 그 둘도 없음을잊은 채 살아간다.
되돌아갈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 한해가 갔다. 이제 회한에 빠져 있을 시간도 남지 않았다. 다시 예비된 시간으로 건너갈 새로운 마음을 준비해야겠다. 새로움에는 희망이 있다. 새 생명이 꿈틀거린다. 할 수만 있다면, 헌 구두에 새 굽을 달듯 내 영혼에 새 깃을 달고 싶다. 새로이 태어나고 싶다. 그래서 살아 있는 자의 감사함을 어떻게든 갚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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