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행정구역개편 또 정치권 논란

한동안 잠잠했던 행정구역개편문제가 최근들어 다시수면위로 부상하고 있어지방선거를 앞둔 정국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행정구역개편 문제는 오는 6월27일에 실시하도록 법에 명문화돼 있는 4대 지방자치선거 연기론과 불가분적으로 연계돼있기 때문에 정치권 내부에서는 공개논의가 어려운 금기로 여겨져왔다.지난해 12월초순 민자당 일각에서도 일부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행정구역개편 필요성이 산발적으로 제기된 적이 있으나 지자제선거 연기 반대론에밀려 별다른반향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특히 김영삼대통령이 1월6일 연두기자회견에서 "꼭 필요하나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어렵다"고 사실상 포기의사를 밝힘으로써 행정구역개편문제는 완전히 물 건너간 것으로 인식이 됐다.

물론 "꼭 필요하다"는 김대통령의 언급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듯이 여권이혁명적인 정부조직개편에 이은 후속조치 차원에서 가급적 지자제 선거전에행정구역개편을 추진하고 싶어 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렇다할 계기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경실련이 13일 기자회견을 통해 행정구역개편을 공식 제안하고 김덕용민자당사무총장이 14일 이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공론화의 필요성을 적극 제기하고 나섰다.

김총장과 경실련, 그리고 여권핵심부간에 혹시 사전교감이 있었는지는 알수없으나 정치권이 아닌 시민단체가 행정구역개편 필요성을 제안하고 나섰다는점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지방자치의 주역인 지역주민 또는 시민이 원한다는 형식논리를 갖추는 것은정치적 이해득실을 먼저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정치권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는 그 성격과 파장이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총장은 이날 고위당직자 회의에서 자리에 앉자마자 경실련의 제안내용을거론하면서 "지자제 선거전에 개선할 내용이 없는지 여야간에 진지하게 토론할 기회는있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김총장은 다른 당직자들의 부정적인 입장표명에도 불구하고 "행정구역의 문제점을 두고 지자제에 바로 들어가게 되면 기득권때문에 조정이 어렵게 된다"며 "지자제실시에 따른 문제점에 대해 정치권이 대비하는 노력이 너무 부족했다"고 행정구역개편 필요성을 거듭 역설했다.

문제의 핵심은 경실련과의 사전교감 여부보다는 지자제 선거를 총괄하고 있는 집권당의 사령탑격인 김총장이 행정구역개편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는점이다.

특히 관심을 모으는 대목은 김총장과 경실련 모두 행정구역개편과 지자제선거를별개의 독립된 사안으로 분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편방향과 내용에 있어서도 거의 일치하고 있다.

부연하자면 여당이 공약하고 선거일자가 법으로 정해진 지자제 선거에 절대로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가능한 범위내에서 행정구역개편을 추진하자는얘기인 것이다.

경실련은 지방자치 관련제도의 개혁을 촉구하기에 앞서 "6월 지방선거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연기할 수 없는 것으로 그 어떠한 사안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고 선거연기 불가를 분명히 못박았다.경실련이 행정구역개편 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도를 없애는등 대대적인개편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것도 선거를 연기하지 않으면서 개편문제를 매듭짓자는 뜻을 담고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경실련이 제안한 제도개혁안의 골자는 크게 △특별시.광역시 구의 준자치단체화△군포시와 의왕시등 불합리한 행정구역의 경계조정 또는 통폐합 △기초의회 의원선거의 정당공천배제와 사회단체의 선거관련활동 보장등으로 요약된다.

이 가운데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구를 준자치단체로 격하하자는 내용이다.

경실련은 이와 관련, "대도시의 자치구는 행정수행을 위한 행정단위가 될수는 있으나 자치를 위한 자치단위가 되기에는 여러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예를 들자면 서울 종로구의 경우 일반 시.군지역과는 달리 독자적인 생활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도로와 교통, 도시계획에 관한 권한은 물론 상하수도나 쓰레기처리에 관한 사무도 자치사무로 부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따라서 이러한 구를 준자치단체로 구분해서 구청장을 지역주민의 투표로 뽑지말고 민선구청장보다 급을 한단계 낮춰 중앙에서 임명하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는게 경실련측의 주장이다.

이같은 논리는 중앙정치가 일선행정조직에까지 파급되는 것을 막고 행정능률과 대민서비스를 향상시킬 뿐아니라 시의원이 대폭 축소되고 구를 대표하는의원도 없어져 정치비용의 낭비를 줄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그러나 정치적인 논리로 보면 여당측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다 줄 가능성이없지않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당장 민주당은 설훈 부대변인의 논평을 통해 "민자당 사무총장이 행정구역개편을 주장한 것은 지방선거를 연기하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지자제 선거연기 음모로 몰아붙였다.

다만 과천.의왕시의 통폐합과 천안시.군의 재통합등은 공정하고 정확한 주민여론조사가 이뤄진다면 실현 가능성이 높은 편이나 도농복합형 시.군통합이나 시 경계조정은 경실련이나 여권이 의도하는 행정구역개편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김덕용사무총장도 시.도, 시.군.구, 읍.면.동의 3단계로 되어 있는 행정계층구조를 2단계로 축소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시기적으로 촉박하지 않으냐"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김총장은 "특별시의 구단위를 준자치단체로 격하하는 문제를 포함해 기초의회의원 공천배제등 모든 문제를 놓고 정치권이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필요가있다"며 특별시와 광역시의 준자치단체화에 대해서는 강한 집착을보였다.

그러나 여권이 행정구역개편과 지자제 선거연기 문제를 현단계에서 분리하고있지만 행정구역개편 논의의 속성상 일단 공론화 단계에 접어들면 본질적인문제인 행정계층구조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상황변화에 따라 구의 준자치단체화는 지엽말단적 사안으로 가려질 소지가없지않고 결국은 국가백년대계를 위해 지자제 선거를 미루고 행정구역개편을먼저 단행해야 한다는 쪽으로 공감대가 형성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여권은 이처럼 행정구역 개편주장이 지방선거 연기론으로 비쳐지자 즉각 부인하고 나섰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지방선거는 법이 정한대로 실시한다는 것이 청와대의 기본입장"이라고 강조했다.

민자당 박범진대변인도 "어떠한 경우에도 법이 정한 기일에 지방선거를 치른다는 당의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며 "김총장의 발언은 지방선거는 예정대로 치르되 준비과정에서 미흡한 점이 있다면 최대한 개선해가면서 선거를치르겠다는 원론적인얘기였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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