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슬프다, 그리하야 우리의 홍도는 오빠의 공부를 위해 웃음을 파는 기생이 돼야 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변사의 구성진 대사에 따라 울고 웃던 무성영화시대. 찢어진 천막속에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너무나 오래 사용해 빛바랜 필름이 허름한 영사기 위에 걸려 돌아가던 그때, 필름이 끊기면 다시 잇는 시간동안 변사의 입에만 귀를기울이고 그 막간을 유창하게 이어나가는 입심좋은 변사가 최고의 대우를 받던 시절이 있었다.
세계의 영화는 28년 최초의 토키영화 '재즈 싱어'가 나와 새역사를 열었지만우리는 70년대 초까지 변사가 구성지게 읊던 '이수일과 심순애' '홍도야 울지마라'를 보고 들으며 울고, 울분을 못참아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TV가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전에는 영화구경 역시 고급 문화에 속했고 공터마다 차려지곤 했던 서커스나 곡마단정도가 볼거리였다. 부잣집에서는 환등기를 구해 슬라이드 필름으로 사진이나 영화 스틸을 확대시켜 보기도 했지만 소위'활동사진'재미에는 어림도 없었다.
70년대초 TV의 인기드라마 '여로'가 전국민적인 인기를 끌자 TV가 있던 집이나 만화방의 좁은 공간이 발 디딜 틈도 없이 가득차 서로 눈물을 훔쳤던 때이니 만큼 생돈을 내고 영화관에 출입을 한다는 것은 여간한 한량이 아니고는 힘든 시대였다. 40, 50대들에겐 어린시절 돈이 없어 허름한 천막을 헤치고 들어가다 검표원에게 걸려 두들겨 맞거나 운이 좋으면 겨우 목만 내놓을수 있는 자리에 서서 정신없이 희미한 화면을 들여다 보면서, 다음날 친구들에게 자랑한 기억이 남아있는 것이 영화이기도 하다.
"시골에도 활동사진을 볼 기회는 있었지만 부모님들이 허락을 하지 않아 몰래 숨어가서 보곤 했지. 학교운동장에서 활동사진이 드르륵거리며 돌아가고하얀 두루막같은 옷을 입은 변사가 소리를 지르곤 했는데 대개가 '춘향전''장한몽' 같은 것들이었어"
50여년전이라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한 할머니는 "활동사진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나면 온동네가 떠들썩하고 설레임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1895년 3월 프랑스의 루이스, 오귀스트 뤼미에르 형제가 일상생활을 소재로제작한 '열차의 도착(The Arrival of a Train)'이후 10년만인 1905년 영미연초회사의 창고에서 '활동사진'이라는 단편이 소개된 것이 국내 최초의 영화상영으로 간주되고있다. 본격적인 한국영화는 1919년 임성구와 김도산에 의해 서울 단성사에서 상영된 연쇄극 '의리적 구투(의리적 구투)'를 효시로 들고 있고, 1923년 윤백남에 의한 활동사진 '월하의 맹세'가 최초의 국산영화이며 윤씨가 최초의 감독, 이 영화의 여주인공 이월하가 최초의 여배우라는것은 정설로 돼있다. 당시 전국에는 조선극장, 단성사, 부산키네마등 27개의극장이 있었고 윤백남 프로덕션, 조선 키네마, 고려 키네마, 고려영화제작소등 영화제작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당시 영화는 대개 멜로드라마로 '아리랑'을 비롯, '장한몽' '운영전' '쌍옥루' '벙어리 삼룡이''사랑을 찾아서'등이 있었다.
국내에 토키영화가 도입된 것은 1935년. 2천4백원의 예산으로 만들어진 '춘향전'이 그 효시다. 당시 영화제작붐은 전국으로 퍼져가 평양의 서선키네마,대구의 영남영화사, 성봉영화사, 대구촬영소, 진주의 남향키노, 청구키네마사, 함흥의 '길 안든' 영화사등이 창립돼 영화에 대한 열기를 반영했다.40년대의 암흑기를 지나 50년대중반에는 김승호, 최은희등 스타들의 출연으로 당시 전쟁의 폐허와 허무함을 달래주었고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이 서울국도극장에서 개봉돼 엄청난 관객을 불러 모았고 제작사가 71개나 되는 활황국면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영화는 정부의 통제를 강력하게 받게되고, 소재도 신파적인 홈드라마나 코미디물, 멜로물이 판을 쳤다. 40~50대들이 익히 보았을 당시의 영화들은 '로맨스 빠빠' '로맨스 그레이'(감독 신상옥),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감독 엄심호), '또순이'(감독 박상호), '아낌없이 주련다'(감독 유현목)등이었다. 특히 68년에 나온 정소영감독의 '미워도 다시한번'(주연 신영균, 전계현, 문희)은 4편에 걸쳐 제작돼 숱한 관객을 눈물바다로 몰아넣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엄앵란-김지미-고은아라는여배우 트로이카가 최대 활약을 보여 이후 70년대의 윤정희-문희-남정임, 80년대의 유지인-정윤희-장미희시대까지 트로이카 체제가 이어졌다.이들 영화배우들은 남성들에게는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여성들에게는 선망의대상이 돼 대중적인 스타로서의 자리를 확고하게 굳혔고 극성팬이 아니라도잡지나 신문에 난 스타들의 사진을 도려 책갈피에 끼워 다니던 학생들이 많이 눈에 띄기도 했던 것이다.
이제 영화는 현대인들의 스트레스 해소 역할을 하고 있다. 주말이면 언제나극장앞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스타들은 사생활까지 낱낱이 공개되면서 언제나 젊거나 어린 팬들로 휩싸인다. 촬영기술의 급격한발달과 엄청난 제작비의 투입으로 보다 '자극적인 영화만들기'가 성행하고있다. 젊은 세대들의 이상심리를 영화가 대신해서 풀어주는 것처럼 끊임없는살육과 잔인함을 보여주고 또 그만큼 무한한 가능성과 환상의 세계로 새세대를 유혹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텅비어 있다.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몰아닥치기 시작한 외국영화사의 직배와 할리우드와국내에서 동시 개봉하는 시대가 되면서 한국영화는 설 자리를 잃고 있는 것이다. 활동사진은 이미 흔적도 찾아 볼수 없고 다만 활동사진으로 보던 신파극들이 요즘은 연극으로 재구성돼 그 시절의 향수를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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