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75세로 21일 타계한 김상협전국무총리의 삶은 전국무총리로 불리기보다는 전고려대총장이라는 호칭이 어울린다.그럼에도 전총리로 더 기억되는 이유는 그의 일생에서 총리를 지낸 82년6월에서83년10월까지 1년4개월의 짧은 기간이 그의 성품과 이력에 비해 너무나이질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에게 총리는 처음 관직이 아니었다. 5.16후 박정희최고회의의장에 의해 62년 문교장관으로 발탁되기도 했고 80년엔 신군부에 의해 이른바 입법회의 의원이 되기도 했다.
3개의 관직은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이 아니라 그가 그 관직에 '징발'당했다는게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평이다.
그는 5공초기 '의령 우순경 총기난동 사건'과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으로 흐트러진 민심 수습 차원에서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 의해 총리에 기용된 후 6개월만인 82년 연말께 이미 "제 할일을 다 했으니 물러나겠다"고 대통령에게사퇴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막힌 곳은 뚫고 굽은 것은 펴겠다"고 한 취임일성은 국민들에게 큰 기대를안겨줬고 본인도 나름대로 의욕에 차 있었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수행비서 조차 '자기사람'을 데려가지 못한 현실은 곧 그를 여느 총리와 마찬가지로 대독총리, 의전총리로 만들었고 취임일성은 메아리로만 남게 됐다.
그 회한은 퇴임후 "대통령제하의 총리는 동네북이 돼주거나, 악역을 맡는 것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는 자조섞인 회고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권력이 고비마다 그를 탐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기품있는 용모와 포용성 있는 인품, 인촌 김성수선생의 조카라는 명문가 출신의 배경이 있었고,학계에서정치학자로서, 스승으로서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그는 64년 이미 '모택동사상'이라는 저서를 펴내 국내에서 그 분야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80년 발간한 저서제목인 '지성과 야성'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사람들은 고려대 총장 김상협이 "이 시대 새로운 지도자는 치밀한 지성과 아울러 대담한 야성을 한몸에 조화해낼 수 있는 높은 차원의 전인적 인간이어야 한다"고 총장 취임사에서 밝힌 것에 주목하기 시작했다.유신의 서슬이 퍼렇던 70년대 고려대총장 시절 억눌린 학생들에게 야성을 가지라고 주문하고, 시위학생에 대한 당국의 처벌요구에 "젊은 혈기에 그럴 수있는거지"라고 답했다는 일화들은 그를 당시 젊은이들 모두의 스승으로 만들었다.
그는 83년10월 아웅산 폭파사건을 계기로 고뇌에 찼던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85년부터 91년까지 대한적십자사총재와 87년~91년 도산기념사업회장등으로비교적 최근까지 사회에 대한 봉사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28세에 부인 김인숙여사와 결혼, 1남3녀를 두고고려대 교수, 고대총장, 문교장관,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총재를 지낸 뒤대전 국립묘지에서 영면의 자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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