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피눈물을 흘리면서 1·4이후 나홀로왔다'6·25 발발후 향토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작사가 강사랑이 노래말을 쓰고 박시춘이 곡을 지어 가수 현인이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는 6·25 당시 남하한 실향민들의 아픈 가슴을 달래주었다. 이처럼 '해방의 노래'(김용환 노래)부터 '가거라 38선'(남인수 노래) '전우야 잘자라'를 거쳐 서태지의 '교실이데아'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까지 대중가요보다 그시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고있는 것도 찾기 힘들 것이다.
대중과 함께 해온 우리 가요의 50년 역사는 해방이후 악극단과 함께 시작되었다. TV가 보급되기전까지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악극은 연극과 춤, 코미디, 노래가 한데 어우러진 공연형태로 대구, 만경관, 키네마극장(현 한일극장)등에서 주로 공연됐다. "당시 악극단이 전국순회공연을 오면 극장안은 인산인해를 이뤄 사람이 깔려죽는 경우도 생겼고 극성 여성팬들도 많았다"는박광진씨(54)의 말처럼 당시의 대중가수들의 인기는 '뉴키즈 온더 블럭'에비할 바 아니었다. 축음기가 사치품에 속하고 SP판 1장이 쌀 한 말 값이었던만큼 새노래를 들을 기회가 적었던 그때, 레코드가게는 유행음악의 보급창구역할을 했다.해방무렵 대구시 중구 종로1가에 문을 연 악기사 '미광당'이 대표적인 장소. 악기점앞에 확성기를 설치하고 SP판을 올리면 40~50명의 인파가 몰려 노래를 들었다.
'신라의 달밤' '고향만리' '럭키 서울'과 '귀국선' '해방된 역마차' '달도하나 해도 하나' '전선야곡' '자명고 사랑' '울고넘는 박달재' '빈대떡 신사''비내리는 고모령'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이별의 부산정거장' '오동동 타령' '방랑시인 김삿갓'등이 50년대 초반까지 사랑받던 노래였다. 50년대 후반에는 '아리조나 카우보이' '비내리는 호남선' '댄서의 순정' '럭키모닝''과거를 묻지마세요'등이 유행했는데 이중 많은 곡들은 요즘에도 즐겨불릴 정도로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60년대부터는 경제성장과 함께 가요계 역시 급격히 팽창했고 내용 역시 전쟁과 눈물, 이별을 애닯아 하는 노래보다 서양문화의 영향아래 밝고 활기찬 노래가 많이 등장했다.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동백아가씨' '빨간 마후라''짧은머리 짧은 치마' '사랑해' '님은 먼곳에' '이름모를 소녀'등이 당시의대표적인 대중가요. 70년대는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로 상징되는 포크음악이인기를 끌었지만 가사에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 금지곡이 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후 포크음악은 사회성 대신 서정성을 강조한 '모닥불' '꽃반지끼고' '밤배'등으로 인기를 얻었고 한편으로 80년대 운동권가요의 기초가 되었다.
서울중심의 대중문화가 보편화된 요즘이지만 해방당시만해도 각 지방별로 독특한 대중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대구 경북지역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미광당'을 중심으로 20여명의 대중음악인들이 '대구음악구락부'를 결성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47년 설립된 '오리엔트 레코드사'(대표 이병주)를 중심으로 향토출신 음악인들이 배출되었고 피난행렬에 끼였던 유명가수들을 흡수한 6·25를 전후해 지역 향토음악계는 황금기를 맞았다. 분단과 전쟁을 경험하면서 대중가요는 미국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미군부대는 대중음악인들에게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가 되었고 이곳에서 활동하던 가수들이 인기가수로 사 랑받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통신기술의 발달과함께 미국일변도에서 벗어나 일본, 유럽음악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가요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기술의 발달역시 빠른 속도를 유지했다. 해방직후의 레코드는 남은 음반을 숯불에 녹여 재생한 SP판으로 해방전후 레코드발매 량은 연 20여만장 수준이었고 이것은 84년 2백70여만장으로 늘었다. 최근 가수 김건모의 3집 앨범판매량이 2백만장을 돌파한 것만 봐도 우리 가요계의 양적 팽창을 어림해 볼 수 있다. SP의 뒤를 이었던 LP가 86년도부터 보급된 CD에 밀려 레코드가게에서 설 자리를 잃고 있는 것과 LD, 멀티미디어의보급으로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변해가는 현상도 빠뜨릴 수 없는 변화다. 다음은 레코드녹음 스튜디오조차 없었던 해방직후부터 가수로 활동했던 한국연예협회 대구지부 고문 강남달씨(69)의 음반취입기 한토막."해방후 얼마안돼 음반을 내는데 대구에는 녹음스튜디오가 없었어. 할수 없이 한밤중에 아는 다방에서 창문마다 천막을 치고 녹음을 했지. 새벽녘이 되서야 녹음이 괜찮게 돼 마지막 소절에서 '이젠 다됐구나' 생각했는데 갑자기두부장수 종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다시 녹음을 해야 했어"
60년대 미8군쇼 출신의 가수들이 인기를 누리면서 형식면에서 세포분열을 시작한 우리 가요는 날이 갈수록 다양화되고 화려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그러나 가수의 생명이 노래 한곡으로 마감되고 외국 음악의 무분별한 모방으로 문화적 충격과 표절시비등을 일으키는등 문제점역시 드러나 우리 정서에맞는 대중가요문화의 발전이 절실한 실정이다. 〈김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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