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향토체육의 맥 123-육상3-20년대 대구고보 "따를자 누구냐"

춘계대운동회가 해마다 계속됨에 따라 학교육상은 눈부시게 발전해나갔다.운동회때마다 학교대항전이 펼쳐져 학교마다 육상선수발굴에 주력했고 운동장에는 연습하는 학생들로 넘쳐났다.육상은 다른 운동처럼 시설과 장비가 필요없고 공터만 있으면 누구나 할수있는 손쉬운 운동이어서 당시 학생들 사이에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대구부내 중학교 가운데 육상부문 선두주자는 단연 대구고보였다.대구고보는 제1회 춘계대운동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을 비롯, 20년대 후반까지 운동회와 학교별 대항전에서 최강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특별활동시간에는 너나없이 육상부로 몰려들었고 방과후면 보통 50여명이 운동장에서 달리기나 던지기 연습을 할 정도였다.

육상에 몰두한 일부 학생들은 일본에서 육상전문잡지를 구입, 서로 돌려보며연습방법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같은 학교분위기에서 뛰어난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는 것은 당연한 일.특히 대구고보에는 뛰어난 단거리선수가 많았다.

20년대 중반 1백m왕좌를 독점한 서팔룡을 비롯 최인호 이상옥 김목탁 등 기라성같은 선수들이 포진, 전국최강수준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서팔룡은 향토육상계에서 처음으로 화제를 모은 선수.

1923년 대구고보 교내운동회 1백m경기에서 서팔룡은 11초대의 기록으로 우승, 도내에서 가장 빠른 선수로 부상했다.

그가 세운 1백m기록은 대구상업의 표문철이 대구부민운동회에서 10초9로 우승한 1928년까지 깨지지 않았다.

그는 육상뿐 아니라 야구선수로도 대활약, 대구부 중학선수 가운데 최고의강속구를 구사하는 투수로도 유명했다.

최인호는 서팔룡과 동급생으로 역시 1백m를 11초대에 주파할 정도의 실력을지니고 있었다.

선수시절 그의 활약도 대단했지만 그후 지도자로 향토육상발전에 기여한 공도 빼놓을 수 없다.

졸업후 경성으로 올라가 육상 전국최강을 구가했던 배재고보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지역선수들을 스카우트, 이들이 전국무대를 누빌수 있도록 지도하고배려했던 것.

김목탁은 이들의 후배로 운동회때면 1백m 2백m 4백m 등 3종목에 걸쳐 항상 1위로 골인, 관중들 사이에 최고인기선수로 꼽혔다.

대구고보의 단거리선수들은 1920년대중반 지역에서 열리는 육상경기대회 단거리부문을 휩쓸었고 달성공원에서 열린 춘계대운동회는 이들의 독무대였다.특히 이들 4명으로 구성된 4백계주진용의 위력은 엄청나 지역에서는 무적으로 군림했다.

그때 춘계대운동회의 최고 인기종목은 4백계주경기였다.

경기가 열리는 달성공원을 2바퀴 도는 코스로 당시 달성공원 한바퀴가 2백50m에 가까웠으니 실제 경주거리는 5백m에 가까웠다.

학교마다 치열한 응원전을 펼치며 격렬한 대결을 펼쳤지만 선두는 항상 대구고보 선수들이었다.

지역에서 적수를 찾지 못한 이들은 전국무대로의 꿈을 키웠다.1926년 제2회 조선신궁경기대회.

대구고보 계주팀은 마침내 전국제패의 꿈을 실현할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신궁경기대회는 일본인 체육단체인 조선체육협회가 일본에서 열리는 신궁대회에 참가할 대표를 선발하기 위해 주최한 대회로 각지역대회와 조선신궁대회가 있었다.

지역대표로 전국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했지만 대구고보팀은 예선에서 다른 팀과 엄청난 거리를 내며 1위로 골인, 파란을 일으켰다.

최종결승에서도 이들은 역주를 거듭, 관중들의 열띤 응원을 받았으나 간발의차로 경성사범연습과팀에게 분패, 2위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대회 이후 경북육상에 대한 인식이 전국에 확산, 춘계대운동회에전라 충청 등의 원정선수들까지 참가하는 계기가 됐다.

한편 중장거리와 투척 등에서도 대구고보는 강세를 보였다.중장거리에서는 김준기 임점금 안석기 김재근 등이 활약하며 경북육상 중장거리부문을 주도했다.

10종경기에 능숙했던 김봉구도 역시 대구고보 단거리에서 활약하던 선수.그는 당시 전천후선수로 불릴만큼 육상이라면 어떤 종목이든 닥치는대로 뛰었다.

전국대회에서도 그의 활약은 두드러져 제2회 조선신궁경기대회 10종경기서우승하는 등 향토육상의 명성을 높였다.

육상부의 발전에 따라 대구고보 응원단도 대구부에서는 으뜸으로 통해 다른학교에서 이를 본딸 정도였다.

당시 대구고보 응원단장은 최영호씨.

유도를 했던 그는 큰 몸집에 엉성한 폼으로 교기를 흔들며 응원을 지휘했지만 그 엉성함 때문에 오히려 주위관중들까지 대구고보의 응원에 가세했다.337박수, 파도 등 지금도 쓰이고 있는 응원방법이 그당시 생겨났다.학생들 사이에서 육상이 최고인기종목의 자리를 누릴수 있었던 데는 이처럼육상경기가 열렬한 응원속에 진행돼 학교대표선수들이 부러움을 산 덕분이기도 했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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