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본 양심적 인물 재평가

임란 당시 왜장으로 종군, 부산에 상륙한 당일 반기를 들고 조선군에 투항한일본무장 사야가(한국명 김충선)가 일본의 학계 언론계로부터 '일본의 양심''정의의 수호자'로 재평가되고 있다.김충선의 14대손인 김재덕씨(전 대구 수성국교장)가 출간한 '모하당 김충선'(대일출판 펴냄) 사론에 따르면 사야가에 대한 일본의 시각이 종전 직후에는 '매국노' '반역자' '국적'으로 비난받다가 최근에는 '우리는 지금 사야가를 찾고 있다'는 경향으로 급변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일본 NHK는 92년에 '출병에 대의없다-풍신수길을 배반한 사나이 사야가'를방영했으며, 일본 애지현신성시교육위원회, 경도예술단기대학의 교사 학생들은 94년에 이어 95년에도 사야가가 영면한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 연수여행을기획하고 있다. 또 사마요태랑, 관정정지, 신기수 촌상항부의 단행본, NHK의역사발견 시리즈등에서도 사야가를 흠모하는 정서가 일반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임란당시 22세로 가등청정에 종군한 무장 김충선은 조선의 문화와 예의를 사모, 3천병을 이끌고 경상도 절도사의 군에 투항해서 경상도 의병과 제휴하고일본군의 조총과 화학 기술을 전수하여 패전을 거듭하던 전국을 반전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사야가의 공적을 인정한 조선왕조는 사성 '김해김씨'와 종2품 벼슬을 하사했고 사야가는 한국이름인 모하당 김충선으로 개명했다.

김해김씨가 된 사야가는 울산성을 기점으로 철포대를 훈련해서 일본군을 공격했고 1600년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하여 달성군 우록동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사야가의 6대손 김한조에 의해 '모하당 문집'(1915년)이 발간되자 청류강태랑이 일어로 옮기면서 '이와같은 매국노가 동포중에 있는 사실을 믿는이가 있는 것은 유감의 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을 정도로 반감이 극심했고 이런 분위기는 60년대에도 이어졌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인류애의 수호자'라는 평과 함께 사야가를 양식있는무사의 정의로운 결단으로 재평가되고 있음을 이 사론에서는 보여주고 있다.한편 한일 양국에서는 사야가가 살던 달성군 우록동이 두나라의 평화를 증진시킬 수 있는 적지라는 여론과 함께 우록동 개발론이 일고 있다.〈최미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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