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후반들어 대구사범과 대구농림이 육상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기시작했다.춘계대운동회나 학교대항경기서 항상 대구고보에 우승을 내주던 이들이 마침내 대구고보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전국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대구사범 육상의 선두주자는 최무룡이었다.
그는 단거리에서 당시 최강이던 대구고보의 서팔룡과 대회때마다 각축전을벌여 이들의 대결은 관중들의 최고 흥미거리였다.
열띤 함성속에 벌어지는 경기에서 최무룡은 번번이 간발의 차로 고배를 마셔주위의 안타까움을 샀지만 그의 기량 역시 전국정상수준이었다.1927년 6월 경성운동장서 열린 경성상업주최 제1회 전조선중등학교 육상경기대회에는 대구사범선수들을 주축으로 한 경북대표팀이 출전했다.여기서 최무룡은 1백m와 2백m에 출전, 각각 2·3위에 입상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또 8백m계주에 나선 대구사범팀은 1분41초5의 기록으로 양정 경성사범 등 육상명문들의 콧대를 꺾고 우승을 차지, 경북육상의 숨은 저력을 과시했다.그 이후로 단거리에 최득수 윤계술 오상석 등과 장거리에 박세봉 한준현 등이 등장, 대구사범육상팀의 명성은 높아져갔다.
이들의 활약으로 대구사범은 '만년2위'의 자리를 떨치고 정상에 오를수 있었다.
특히 대구사범이 대구고보를 완전히 압도한 부문은 4백계주였다.대구사범에 오상석이라는 걸출한 단거리선수가 등장, 4백계주 선두주자로 나서 대구고보팀의 독식에 쐐기를 박은 것.
1934년 대구사범에 입학한 오상석은 2학년때 경북육상 단거리부문 1인자로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의 주종목은 4백m.
4백m는 1920년대부터 경북최고기록이 당연히 조선최고기록으로 꼽힐 정도로전국정상수준에 있던 부문이었고 뛰어난 선수도 부지기수였다.1920년대 중반 4백m를 휩쓸었던 김목탁과 그의 뒤를 이어 경북최고기록을 보유한 대구고보의 이용학은 전국무대에서도 적수를 찾기 힘들었던 선수들.5년이 넘도록 깨지지 않던 이용학의 기록을 깬 선수가 바로 오상석이다.1935년 대구사범 2학년이던 그는 처음으로 공식대회에 출전, 4개의 지역육상대회 4백m를 석권했다.
당시 4개의 대회는 조선신궁육상경기 경북예선, 경북육상선수권대회, 일본군80연대 군기제 육상대회, 대구부민운동회 등.
지역을 휩쓴 그는 1937년 제13회조선신궁대회에 경북대표로 나서 마침내 전국1인자의 자리에 올랐다.
4백m서 51초로 신기록을 세우며 1위로 골인한 것.
그의 기록은 엄팔룡이라는 대구육상의 거목이 탄생한 해방후까지 계속됐다.대구사범 못지않은 기세로 대구고보의 아성을 무너뜨리며 급성장한 학교가바로 대구상업이었다.
대구상업은 20년대후반 배천우 권중보 김석주 표문철 등 쟁쟁한 단거리 선수들을 앞세워 지역육상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특히 표문철은 1백m와 2백m에서 서팔룡을 능가하는 탁월한 기량을 발휘, 단연 돋보인 선수였다.
주위에서 적수를 찾지못하던 그가 패배의 쓴맛을 본것은 대구상업2년생이던 1928년 참가했던 전조선육상경기대회.
2백m경기에서 2위에 머문 그는 이후 1년동안 피나는 훈련을 거듭해 다음해대회 2백m에 다시 출전, 24초1이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기어이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의 기록행진은 여기에 그치지 않아 그해 대구부민운동회때 1백m를 10초9로 주파, 깨지기 힘들다는 서팔룡의 기록을 경신했다.
다음해인 1930년 3회전조선육상경기대회에서도 그는 1백m에서 우승, 향토단거리계에서 그를 두고 '육상경기의 표상'이라 부를 정도로 맹위를 떨쳤다.이때 대구상업은 투척에서도 대구부내 다른 학교들을 압도했다.특히 투포환으로 유명했던 이준갑은 1928년 전조선중등학교선수권에서11.17m를 던져 우승한 이후 5년동안 최강의 자리를 지킨 명선수.이준갑의 기록을 깨고 나타난 던지기의 명수는 대구농림의 김윤근이었다.대구농림은 20년대후반부터 조래수 정명수 등 단거리선수와 장거리에 백창기 남유복 등 강자들을 배출한 저력의 강팀.
원래 대구농림에서 씨름선수로 유명했던 김윤근은 6척장신에 몸집이 굵어힘이 장사였다.
당시 운동선수는 만능선수여서 대부분 여러종목을 하고 육상은 기본종목으로 익히는게 보통이었다.
특히 씨름이나 유도 등 힘을 바탕으로 한 종목의 선수들은 던지기선수로 육상대회에 참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타고난 힘은 던지기에서도 위력을 보여 기본기만 연습한뒤 출전한1934년 제10회 조선신궁경기대회 투포환에서 12.90m로 1위를 차지, 주위를놀라게 했다.
그후 김윤근은 씨름에 몰두하면서도 틈틈이 던지기연습을 해 이듬해 전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대회에 다시 출전, 투포환과 투창에서 자신의 기록을 깨며각각 2위에 오르는 괴력을 보였다.
1920년대 후반 전국무대에 출전하기 시작한 경북육상이 이처럼 빠른 시간에 두각을 나타낼수 있었던 것은 대구부내 각급학교간의 치열한 경쟁이 밑거름이 됐다.
춘계대운동회를 비롯한 각종 육상대회가 활성화돼 시민축제로 승화하면서학교육상의 발전이 수반됐고 여기서 뛰어난 선수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졌던것.
해방직후부터 향토육상이 전국을 제패하며 누린 황금기의 육상지도자 대부분이 이때 배출된 선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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