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실학-교산 허균하-뜨거운 민중사랑 문학속 면면히

허균(허균)의 한시대를 앞선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사상과 행동은 현재까지도그의 가계에 고통을 강요하는 대역죄인의 낙인을 찍었으나 우리 국문학사에서는 크나큰 업적을 남겼다.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소설을 남겼으며 그의 독창적인 문학·시학이론은 우리나라 근대문학 태동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그의 문학론과 시평(시평)은 특히 신라의 향가시대때부터 문학이 무엇인가하는 문제를 싸고 끊임없이 반복돼온 보수와 혁신의 대결선상에서 혁신쪽에서우뚝선 이규보(이규보), 서경덕(서경덕)의 뒤를 이어 민중문학의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다.

허균은 그의 사회 정치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학에서도 대반역을 했다.성리학을 국가지도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시대의 문학은 성리학의 이기이원론(이기이원론)에 입각, 사람의 정(정)이나 감성보다 이성(이성)이나 도덕성을중요시 함으로써 집권사대부층의 전유물로, 사회지배수단으로 한정돼 일반백성의 희로애락 표출과는 거리가 먼 약점을 애초부터 안고있었다.그러나 임진왜란후 급격한 사회제도의 붕괴와 변화로 신분이 향상된 하층계급의 아전 중인들을 중심으로 현실의 삶에 바탕한 위항문학(위항문학)이 생겨나는등 서민들의 문학적 욕구가 급상승 했다.

이같은 하층계급의 흐름을 감지한 허균은 문학은 도(도)를 구현하는 재도지기(재도지기)라며 물아일체(물아일체 )경지의 음풍농월이나 하는 기존의 문학관에 도전, 문학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상하의 정(정)이 통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하고 '남녀의 정욕(정욕)은 천(천)이요, 윤리(윤리)의 분별은 성인(성인)의 가르침이니 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천품(천품)의 본성은 감히 어길수 없다'고 주장했다.

허균은 이 이론을 바탕으로 피지배계급인 백성의 고난과 이상을 다룬 '홍길동전'을 짓고 '엄처사전(엄처사전)' '장산인전(장산인전)' '남궁선생전(남궁선생전)' '장생전(장생전)'같은 재주는 있으면서도 사회제도에 얽매여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서얼 천민들의 슬픔과 희망을 묘사한 한문소설을 썼다.허균시대 집권사대부의 문학관은 허균 자신도 '홍길동전'을 자기의 문집에못넣었을 정도로 소설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고 마땅히 규탄돼야 할 것이었는데, 그는 내용마저 집권사대부측에서보면 잡스러운 것을 늘어놓아 반기를 들었다.

뿐만아니라 그는 자신의 한시문집에도 기생 계생, 첩노릇을 한 이옥봉 천인유희경 백대봉, 승려 삼교등의 시를 끼워 편집해 집권사대부의 근엄을 농락했다.

한시는 원래 상층 지식인의 것이었고 사대부의 자격을 가늠하는 요건 이었다.

그러나 허균은 한시라고해서 사대부만 쓰라는 법이 어디있느냐는 생각에서한걸음 더나아가, 참다운 문학은 부귀영요(부귀영요)에서 이루어 지는 것은아니고 험난하고 어려운 사회경험에서 생겨난다고 말해 하층민이야 말로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는 일차적인 자격이 있다는 결론에까지 이르렀다.그러면서 허균은 당시 사대부의 시에대해 '중국 당송(당송)때의 소식(소식)이나 황정견(황정견)을 으뜸으로 삼아 이름있는 대유(대유)라도 답습하는데머무르고, 그 나머지 문인들은 모두 그 지게미를 먹거나 썩은 배방의 말을만들고 있어, 읽으면 염증이 난다'고 혹평하고 '나는 나의 시가 당나라나 송나라의 시와 비슷하다느니 하게 될까 두렵고, 오직 허균의 시라고 말하게 하고 싶다'고 말해 우리문학의 독자성과 독창성을 강조했다.

또 허균은 시·소설등의 문학용어는 그 시대 그 지역의 상어(상어)를 써야뜻이 통하고 살아있는 글이 된다고 주창, 당시 중국의 고사나 고어를 답습하는 모화(모화)주의적 시작태도를 배격했다. 이같은 허균의 주체적 문학관은후대 김만중(김만중)이 우리말로 쓰여지는 문학만이 진정한 문학이라고 선언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국문학자 조동일(조동일)교수는 허균은 우리문학이 우리의 현실문제만 다루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말로 쓰여진것이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선구자였다며 허균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허균은 자기시대의 이단자였다. 그의 주장은 당장 공감자를 얻기 어려웠다.하층민과 함께 일으킨 반란은 성공할 수 없었다. 결국 자기자신이 처형되었고 만고의 악인이며 천지간의 괴물이라는 낙인을 받았다. 그후에도 허균의신원(신원)을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고 악평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홍길동전'은 살아남아서 소설시대를 열었고 허균의 문학사상은 실학시대에 이르러서 새로운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실학자 중에서도 허균의 사상을 계승한다고 나선 사람은 없었지만 사상의 맥락은 계보나 학풍에 구애되지않고 여러방면에서 나타났다"

당시 대역죄인에게는 경국대전(경국대전)의 대명률(대명률)에 따라 엄한 벌을 내렸다.

공모자는 모두 능지처참하고 아내와 아들은 나이가 16세가 넘는자는 교살했다. 16세가 못된자와 어미 딸 처 첩은 종으로 삼고 백부 숙부 그리고 형제의아들은 유배시겼다.

허균이 대역죄인으로 감옥에 갇혔을때 연좌대상 친족으로 둘째부인 안동 김씨와 아들 굉(굉) 두 딸, 세명의 첩 그리고 첩의 소생 돌한이 있었고 큰형과둘째형의 아들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모진 고문을 받아 죽거나 귀양살이를 갔으나 부인 김씨와 아들 굉은 살아 남았다.

울산에 살고있는 양천 허씨의 가승(가승)족보에는 아들 굉의 아래에 '무자년(허균이 죽은해)에 문경새재를 넘어 처음 영천서 살다가 울산에서 훈장 노릇을 하며 살았다' 또 손자 흠(흠)밑엔 '후손에 이르러 다른 파에 의존해서 족보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허균연구가들은 이 자료와 허균이 옥에 갇혔을 때 추종세력들의 반발이 있었다는 당시 기록을 미뤄 허균의 잔존세력이 두 모자의 목숨을 구하고 숨어 살면서 혈통을 유지하게한 것으로 보고있다.

현재 직계손으로 허균의 10대후손인 백만(백만)씨가 서울에 살고 있으며 82년에야 교산공파로 족보에 등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허균의 묘소는 당초 과천에 있었으나 60년대 도시계획선에 편입되는 바람에현재 용인군 원산면 냉리로 옮겨졌으며 그의 명성에 비해 초라한 묘소는 그동안 후손들의 어려움과 사회적 냉대를 대변하는 듯 하다.

몇몇 문인들과 집안 사람이 중심이 돼 93년 허균·허난설문학회가 구성돼 해마다 허균문학상과 허난설 문학상 작품을 공모, 시상하며 선각자의 뜻을 기리고 있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최종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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