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육상초창기 여자선수들의 활약도 대단했다.춘계대운동회의 영향은 여학교에도 미쳐 대구여고보(경북여고전신)를 중심으로 육상열기가 일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대구여고보의 권향해. 대구여고보 1회졸업생인 그는 1923년 제1회 대구부민운동회때 첫 출전, 50m 1백m 등 단거리부문을 휩쓸며 관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그의 뒤를 이어 이두남 등이 향토여자육상을 이끌었지만 아쉽게도 이들은 전국대회 출전기회를 얻지못해 더이상의 명성을 얻지 못했다.향토여자육상이 전국무대에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접어들면서부터.
운동회때 학교대항육상경기가 점차 치열해진데다 각종 여자경기가 늘어나면서 여학교들의 경기력이 크게 향상, 여자육상의 기반이 탄탄해져갔다.이무렵 활약한 대표적인 선수는 김화자 정반련 정동택 등.
김화자는 향토여자육상 최초로 전국무대에서 금메달을 따낸 선수.1933년 경성운동장서 열린 제9회신궁경기대회에 참가한 김화자는 8백m에서 3분10초를 기록하며 1위로 골인, 향토여자육상의 명성을 높였다.그후 80m허들에서 정반련 등 많은 선수들이 전국정상에 오르며 향토여자육상은 꾸준히 발전해갔다.
박만태씨(전경북체육회부회장)는"이처럼 각급학교의 육상열기가 높았던 것은춘계대운동회를 통해 학생들에게 극일감정이 고취된 덕이 컸습니다. 하지만체육활동은 일제의 식민정책에 따라 부침을 거듭할수밖에 없었지요"라고 설명했다.
광주학생의거 다음해인 1930년 춘계대운동회는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학생활동에 많은 제한이 가해짐에 따라 경기는 활기를 띠지 못했고 치열하던응원전과 관중들의 열기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1년여만에 일제의 탄압이 어느정도 가라앉았고 뜻있는 이들은 다시 춘계대운동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서기하(당시대구포목상상무) 서상일(대구운동협회부회장) 등이 경비를 모으고 대회준비에 심혈을 기울인 끝에 1931년 제5회대회는 성황을 이룰수 있었다.
5백여명의 선수단이 참가, 조직적이고 규모있는 대회로 거듭난 춘계대운동회는 1932년 일본인교장들의 방해로 참가인원이 줄기도 했으나 1934년에 이르러서는 사상최대규모로 성대히 치러질 정도로 발전했다.
보통학교 중학교 야학당 청년단 등에서 참가한 선수만 1천여명에 이르렀을정도.
되살아난 춘계대운동회의 영향으로 학교체육은 다시 활기를 띠었고 1930년대전국무대에서 향토선수들이 명성을 높인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같은 열기도 잠시, 운동회를 못마땅히 여긴 일제의 갖은 방해로 결국 지역최대의 체육행사였던 춘계대운동회는 1935년 9회대회를 끝으로 막을내리고 말았다.
1930년대 후반 들며 일제의 탄압으로 친일단체와 일본신문이 주최하는 경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열리지 못해 향토육상인들은 경북육상재건을 위해 뜻을모았다.
왕년의 스타들인 최무룡 김목탁 배영암 등이 선수발굴을 위한 경기를 갖기로합의, 숱한 어려움을 뚫고 경북육상경기선수권대회를 개최한 것.대회는 매년4월 체육의 날에 각급학교대항 등 열띤 분위기 속에서 진행돼 춘계대운동회를 잇는 조선인들의 행사로 학교육상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대구에 주둔한 일본군 80연대가 30년대초반부터 개최한 군기제 행사에도 육상경기가 포함,선수들이 실력을 겨룰 수 있는 무대가 됐다.대구부내 중학교 전체가 참가한 이 대회에는 학교마다 수업을 전폐하고 학생들을 동원,열전을 벌였고 여기서도 많은 선수들이 배출됐다.30년대말 조선단체주관의 모든 행사가 일체금지되면서 군기제육상경기를 시작으로 순수한 육상종목은 점차 사라지고 40년대에 이르면 체육행사는 군사훈련형태로 변질돼갔다.
완전무장하고 수십㎞를 달리는 무장경기와 수류탄 던지기 등이 가장 중요한종목으로 선수들에게 권장됐다.
무장경기 단체전은 학교마다 5명1개조가 의무적으로 참가, 대구사범을 출발,가창 대덕산 성당못 등을 거쳐 되돌아오는 24km코스로 군인들의 경기를 방불케했다.
이경철씨(전영남고교사)는"군사훈련종목이 대부분인 경기에서 학교의 지시에따라 억지로 출전한 선수들간에 경쟁의식이 있을리 없었지요. 자연히 체육열기는식게 되고 운동장을 찾는 관중도 보기힘들었습니다"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만행이 극에 달한 일제는 경기종목을 변질시킨데 이어 대구유일의 종합운동장이었던 대명동 공설운동장마저 글라이더연습장으로 개조하는 추태를 부렸다.
1937년 완공된 대명동운동장은 8천5백여평규모에 6천명수용스탠드를 갖춘 육상경기장과 본부석 내야스탠드 펜스까지 설치된 야구장 등이 들어서있던 현대식시설이었다.
2차대전막바지에 가서는 우수선수들이 학병으로 끌려가는 경우도 잦아져 체육에 대한 관심은 더욱 사라지게 되고 해방때까지 향토육상은 암흑에 빠져들수밖에 없었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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