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투사들이 이같이 낙양에서 땀흘리고 있을 즈음, 임시정부는 수천리 떨어진 항주에 있었다. 우리 항일운동체들이 곳곳으로 분산돼 있은듯 보일 수있는 대목이다.그러나, 윤봉길의거 이후 상해에 이어 실제로 중심적 활동 무대가 된 곳은남경이었다. 이 도시가 당시 중국 수도였다는 점이 그렇게 되도록 영향을 미쳤을 터이다. 중국의 지원은 우리 독립운동에 더없이 필요한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항주에 있던 임정이 35년에는 남경 인접의 진강으로 옮겨오기도 했다.
낙양군관학교에 학생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중국국민당 조직부의 지원 덕분이었지만, 그외 김구선생 계열과 함께 30년대 들어 독립운동계 또하나의 거대한 세력을 이뤘던 김원봉계열은 중국국민당 비밀조직인 '삼민주의 역행사'에 기대고 있었다. 국민당 조직부는 신규식선생 때부터 혁명동지적 우의를맺어 임정 계열을 돕는 역할을 했었다. 반면 장개석이 사장인 역행사는 김원봉 지사가 이 기관 요인으로 있던 황포군관학교 동기동창들을 움직여 뚫어낸지원 세력이었다. 이런 연고로 우리 독립유공 훈포장자 6천5백여명 중에는중국국민당 당원이 28명이나 되고 있기도 하다.
남경이 새로운 독립운동 거점으로 부상한 것은 32년 의거 직후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가장 먼저 남경에 진입한 것은 김원봉의 의열단이었다. 21세때 금릉대학에 입학함으로써 이 도시와 인연을 갖고 있던 김원봉은 만주와황포군관학교(광주)를 거쳐 27년 광주봉기(이 시리즈 26회) 이후 상해로 이동했다가 29년 북경으로 거점을 옮겼었다. 그곳에서 6개월 과정의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운영해 기른 인재를 국내로 파견해 공작케 하는 활동을 하던 중만주사변이 나자 '중국국민당과의 연합'을 결의, 남경으로 옮겨온 것이었다.이 즈음엔 임정계열 인사 상당수도 윤봉길의거 이후 검거 선풍을 피해 남경으로 진입했으며, 산골 등지로 피신 다니던 백범 자신도 점차 변성명하고 남경에 출입하고 있었다. 33년 장개석 주석과의 회담을 위해 남경에 들렀던 백범은 이미 부인이 별세해 혼자인 점을 이용, 주애보라는 무식꾼 중국 여자를부인인 것처럼 대동하면서 남경 생활을 이어 나갔다.
이어 만주 인사들 중 한국독립당 계열이 33년쯤 남경으로 전입했으며, 34년에는 만주 조선혁명당 인사들도 본격적으로 합세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남경에는 만주세력은 물론 의열단까지 합류함으로써 상해시대 때보다 더 다양한 항일 운동체들이 결집한 셈이었다. 이 변화는 나아가 독립운동계에 이질적 세력들 간의 연형합종이라는 또다른 움직임을 잉태하기도 했다.하지만, 남경시대 주요 업적이라 할만한 낙양군관학교 한인반은 개설 일년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운영상의 갈등과 일본의 방해 등 때문이었다. 이로인해 백범 계열은 개설 6개월만에 소속학생 38명 중 25명을 남경으로 철수시켜버렸으며, 철기 이범석 등 교관들도 사직, 철기는 중국군으로 복귀해 갔다.남은 학생들은 중국인반에 나뉘어 수용돼 훈련 받고 35년4월 62명이 졸업했으나, 일본이 트집을 잡자 중국정부는 한국인 교육을 아예 중단해 버렸다.백범은 34년8월 중도 퇴학한 학생들 중 안춘생(전독립기념관장)등을 남경의중국 중앙군관학교에 10기생으로 입학시켰다. 이어 이들을 각지로 보내 청년을 모집, '학생훈련소'를 만들어 예비교육을 시킨 뒤 추가로 중앙군교에 입학시키기도 했다.
이런 활동을 펼쳐간 백범의 남경시대 근거지는 지금의 남경시 진회구였다.진회구는 남경을 질러 흐르는 진회하에서 이름을 따 온 구였다. 진회하라고해서 엄청 큰 강을 연상했지만, 실은 시커멓게 죽은 물이 흐르는 너비 10여m나 될까말까한 폐수천이었다. 이 진회하 위에 놓인 회청교는 진회구를 백하구와 연결시켜 주고 있는 작은 다리로, 1천5백년 전 남조시대에 만들어진 귀중한 보물이었다.
백범이 주애보와 함께 부부로 가장하고 산 곳이 이 회청교 부근이었다. 다리의 역사가 말해주듯 이 일대는 역사가 깊은 남경의 옛시가지이며, 따라서 남경 본토박이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백범은 그의 '일지'를 통해 이곳에서 맞았던 일본군의 폭격 장면을 회상해 내고 있다.이 다리에서 진회하를 따라 동쪽으로 2백여m 거리에 있는 '동관두32호'라는집은 백범이 '학생훈련소'를 설치해 청년들을 수용하고 그들을 남경의 중앙군관학교에 보내기 위해 예비교육하던 곳이었다. 주소가 '진회구 동관두'로돼 있어 '동관두'가 무엇인가 했으나, 이는 1천여명의 주민이 사는 2백여호되는 이 마을의 고유명사라고 했다. 그 중 기와집 3채로 된 32호에는 4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이곳에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이 건물이 2백년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환경이 형편 없어 우리 선구자들의 힘든 항일시절을 보는것 같았다. 특히 이들은 "이 집이 일본 점령기(1937~45) 동안은 기생집이었다"고 전해 줘 우리의 독립혼이 고의로 훼손된 것 같이도 느껴졌다.인접한 곳엔 '남기가' 라는 동네 자리도 있었다. 현재 어도가라는 큰길 가까이 있는 이곳에는 학생들이 많이 살아 일본군 폭격 다음에 김구선생이 걱정하는 장면이 '일지'에 나온다. 학생들 외에도 임정 간부들이 많이 이곳에 거주했다는 것인데, 특히 남기가8호 집에는 이동녕선생 등 요인들이 묵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일대는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었다.
이들 세곳의 공통점은 진회구의 중심 거리인 공원가 부자묘 동편 일대라는것이었다. 남경은 지금은 시내 인구가 3백만명 정도 밖에 안되는 도시이지만, 명나라의 도읍지로서 우리의 서울과 비슷한 역사를 가졌다. 그리고 옛날과거보던 거리라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공원가는 그중에서도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그 상징물이 공자 사당인 '부자묘'였다. 지금은 거의 헐리고 상가로 변해 규모가 축소된 부자묘, 그러나 입구에는 여전히 '천하문추'라는 위엄있는 돌글씨가 버티고 서서 옛날을 증언하고 있었다.이같이 김구계열 혹은 임정계열 근거지가 부자묘 동쪽 일대인 점은, 김원봉계열 거점이 주로 부자묘 서쪽이라는 점과 좋은 대조를 이뤄 취재팀을 끌리게 했다. 김원봉계는 30년대 이후 김구계와 함께 우리 독립운동계의 쌍벽을이루기 때문이었다. 두 세력은 나중 중경에서도 이같이 거주지에서까지 다시대조를 보이는 것이다.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