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라진 판소리 명인김소희여사

'국창'으로 일컬어지던 만정 김소희여사(본명 순옥)가 17일 밤 9시 35분께서울 중구 제일병원에서 지병인 간암으로 끝내 유명을 달리했다.올해 78세로 우리 곁을 떠난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의 인간문화재로,특히 판소리 '춘향가'의 명창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 국악계의 원로이다.쪽진 머리에 옥비녀, 옥색치마로 화사하게 단장하고 쥘부채 하나로 관객들을울리고 웃기고 하던 김여사의 판소리는 구성진 수리성와 풍부한 방울목으로유명했다.

지난 93년부터 모진 병마와 싸워온 그는 전통음악의 품격을 지키면서도 국악계 전체의 발전을 위해 온갖 힘과 노력을 다해 온 국악계의 대모.소리에 미쳐 제대로 학교공부를 끝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 했던 그는 독학으로 고등과정을 마쳤고, 제자들을 지도하기 위해 배운 한문을 바탕으로 서예를 익혀 국전에서 3번이나 연속입상하는 실력을 보이기도 했다.판소리 뿐 아니라 가야금, 거문고, 양금, 그리고 살풀이춤에도 뛰어난 예인이었던 김여사는 근대 판소리의 태두 동리 신재효가 태어난 전북 고창 흥덕에서 1917년에 출생, 광주여고보에 들어간 13세 되던 해 당시의 명창 이화중선의 공연에 이끌려 소리의 길로 들어섰다.

동편제의 대가 송만갑 선생에게 소리공부를 시작한 김여사는 정정렬 명창에게 '춘향가'를, 박동실 명창에게 '심청가'를 배우는 등 소리의 경지를 넓히다 열아홉에 일본 빅터 오케이레코드에 전속되어 '춘향전전집'을 취입했다.스물하나에 결혼했지만 10년만에 부군을 잃고 3남매를 혼자서 키운 김여사는조선창극단 시절 민족의식을 불러 일으키는 공연 때문에 왜경에게 붙잡혀 유치장 신세도 진 적도 있었다.

광복 이후 1954년 국악예술고의 전신인 민속예술학원을 설립한 그는 국내공연은물론 1972년 미국의 카네기홀에서 관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는 등 아호 만정이 뜻하는 것처럼 '날이 갈수록 잔잔히 이름을 날린' 명창이다.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떠나가는 배'로 폐막식을 장식한 그는 1993년 국악협회이사장으로 취임해 1994년의 '국악의 해' 지정기념 국악제를 총지휘하기도 했다.

한국국악대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한 김여사의 유족으로는 연극계에서도 활동하는 국악인 박윤초씨를 비롯, 1남 2녀가 있다.지난 달 28일 제일병원에 입원했다가 다시는 못 올 길을 떠난 그는 21일 오전 9시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국악인장으로 영결식을 가진 다음 국악예술고를 거쳐 장지인 고향 마을로 향한다. 빈소 서울대 영안실. 장지 전북 고창군 고창읍 화산리.연락처 (764) 3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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