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향토체육의 맥126-육상(6)

1945년 8월15일 조국해방과 함께 한동안 침체됐던 체육도 다시 기지개를 켜고 되살아나기 시작했다.지하로 숨어들었던 체육인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됐던영남체육회가 다시 간판을 내걸었다.

시설과 기구가 부족한 당시 상황에서 가장 먼저 활기를 띤 것은 육상.영남체육회 활동이 본격화된 1946년부터는 단축마라톤대회를 비롯, 각종 육상경기가 연이어 개최됐다.

이렇다할 체육행사가 없었기 때문에 육상경기는 시민들에게는 최고의 볼거리가 됐고 학교마다 육상붐이 다시 일었다.

해방전부터 육상명문으로 이름을 떨치던 계성 대륜 대구사범 경북여고 등은해방이후의 지역체육부활의 기수역할을 했다.

이해 첫 대회는 3월4일 열린 3·1절경축마라톤대회.

대구역을 출발, 중앙통 봉덕동 대봉동 반월당을 거쳐 다시 대구역으로 돌아오는 약 9km코스였다.

일반·학생 구분없이 진행된 이 대회에서 당시 철도청 소속으로 활동하던 이경철이 1위로 골인했고 이병우(대륜중) 이상용 등이 뒤를 이었다.이경철씨는 "연도의 시민들은 열렬한 응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승부도 중요했지만 해방된 땅을 마음껏 달린다는 기쁨이 앞서 모두들 숨이 터져라 달렸고 관중들의 함성도 그만큼 높았지요"라고 당시를 떠올렸다.4월에는 대구~하양간 55km를 8개 구간으로 나눠 왕복하는 역전경주대회가 경북에서 최초로 열렸다.

시내 중학교가 거의 다 참가, 응원행렬이 연도를 꽉 메운데다 구경꾼들이 계속해서 몰려드는 바람에 선수들이 달리기 힘들 지경이었다.제대로 된 운동화가 있을리 없어 선수들은 밑창에 가죽을 대고 물을 축여 뻣뻣하게 만든 신발을 신고 달렸다.

길이 울퉁불퉁해 선수들이 리어카나 트럭이 지나간 자리나 평평한 갓길을 따라 달리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대회결과 중학부에서는 이병우 박민희 강신달 등으로 구성된 대륜A팀이 1위를 차지했고 B팀도 3위에 입상하는 등 대륜이 강세를 보였다.지역체육이 활성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46년 5월 대명동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시민운동회.

대구뿐만 아니라 인근 경산 칠곡 등지서 새벽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어 경기장은 대성황을 이뤘고 운동장 주변에는 엿장사 등 상인들이 전날밤부터 불을밝혔다.

*이때의 에피소드.

대회를 주관한 영남체육회의 정명진 이용학 등은 밤늦도록 대회준비작업을하다 자정이 넘어 귀가하게 됐다.

마침 순찰중이던 미군헌병의 단속에 걸렸는데 이들의 바지뒷주머니에 출발신호용 총이 있어 진짜 권총을 들이대는 바람에 설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는것.

대회결과 중학부에서는 대륜의 김인한이 11초7로 1백m 우승을 차지했고 8백m릴레이에서도 우승하는 등 대륜이 종합우승의 영광을 안았다.당시 응원전은 새로운 스타일로 진행돼 흥미진진했다.

각 학교는 전날부터 조회대 등을 가져가 좋은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교생을동원했다.

응원가가 없는 학교는 새로운 응원가를 만들어 급히 연습시키기도 했는데 이때 최고의 응원가는 '천안삼거리' '먼산에 아지랑이'등이었다.학교마다 응원지휘대를 만들고 오색옷을 입은 응원단장의 지휘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관중들에게 경기구경보다 응원에 눈길을 모으기 충분했다.

특히 인기를 끈 것은 대륜의 박영조.

일본에서 유학하다 대륜학교에 전입한 그는 일본에서 배운 응원을 응용, 특색있는 응원을 펼쳐 대인기를 누렸다.

그의 뒤를 이어 대륜에는 유병관 이만섭 등 탁월한 응원단장이 배출돼 인기를 이어갔다.

육상경기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 했지만 지도자 시설 용품 등에서 육상이안고 있는 문제점은 너무나 많았다.

이같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먼저 시도된 것이 체육지도자 양성이었다.

1946년 5월 향토체육의 선구자 최영호선생을 비롯,몇몇의 노력으로 경상북도체육과 임시중등교원양성소가 3개월 단기코스로 개설됐다.

그 결과 모두 37명의 향토체육지도자가 양성, 배출됐고 이들이 각 학교에 체육교사로 배치되면서 무질서했던 학교체육이 점차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경철씨는 "경북육상이 50년대를 주름잡을수 있었던 데는 이때 배출된 체육교사들의 활동이 컸습니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육상열기를 정열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끌었고 운동장이 없는동안 동촌방둑에서 선수들을 모아 가르치기도했지요"라고 설명했다.

여자육상도 이에 따라 경북여고를 중심으로 활기를 띠게 됐는데 1946년에는베를린올림픽 마라톤우승자인 손기정씨가 대구에 와 경북여고 육상부를 잠시지도하기도 했다.

손씨는 선수들을 이끌고 중앙통을 달리는 이른바 '로드트레이닝'을 연습의주요일정으로 삼았다.

당시 여학생이 길거리를 달리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으나 손씨가 학교의양해를 얻어 짧은 치마에 체조복 상의를 입은 여학생들이 시내를 달리는 진풍경이 벌어질수 있었던 것.

해방직후 체육인들에게 닥친 가장큰 난관은 운동시설부족이었다.동인동에 있던 공설운동장이 없어지고 대명동 공설운동장마저 8·15해방기념대운동회를 마지막으로 미군이 주둔해 없어지게 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체육인들은 동분서주했고 마침내 1947년4월 대구종합운동장 건설위원회가 결성됐다.

위원회를 중심으로 운동장건설사업이 조직적으로 진행돼 귀속재산이던 칠성동 소채경작지 3만7천여평을 신한공사(귀속재산관리회사)로부터 운동장부지로 양도받아 1948년 2월 착공,준비가 착착 이루어졌다.

운동용품도 희귀해 구기종목은 말할것도 없고 가장 손쉬운 육상용품도 제대로 된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비싼 용품을 구입하기 힘든 선수들은 대부분 광목으로 운동복을 만들었고 천으로 발을 칭칭 감아 달리는 선수도 눈에 띄었다.

동성로에 오륜운동구점이 생겨 스파이크도 만들었지만 자갈밭을 달리다보니침이 굽기 일쑤였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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