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은 오로지 헌법과 양심에 의해 판결한다' 사법부의 독립은 민주주의 초년생이었던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정부수립후 법원,법관의독립성과 권위는 지배권력은물론 국민들로부터도 종종 위협받아왔다.법원의 수난은 국가보안법이 공포된 다음해인 49년 11월18일 대구 법원청사방화사건으로 시작된다. 법원과 검찰이 같이 사용하던 청사가 재판,수사기록과 함께 소실된 방화사건의 주범은 남로당원이었다. 이듬해 2월에는 정부수립후 처음으로 현직법관이 구속됐다. 광주지법목포지원의 강모판사가 수감중인 좌익분자들을 배후 조종하여 탈옥시켰다는 혐의로 구속됐으나 판결결과는무죄였다.안호상전문교부장관에 대한 국가보안법사건,윤재욱국회의원등에대한 횡령사건,김준원 전서울지법원장에 대한 수뢰사건,매일신문 최석채주필에 대한 국가보안법사건등에서 연이어 무죄판결이 잇따르자 이승만대통령은 법원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감추지않았다. 이에대해 당시 김병로대법원장은 "법관은독립하여 재판하는만큼 대법원장으로서도 간섭하거나 지시할 수 없고 또한사법부가 행정부와 협의하여 법을 운영하는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맞섰다.4.19이후 이른바 6대사건 판결은 사법부에 한차례 회오리를 몰고왔다. 당시6대 사건이란 '장면부통령 저격의 배후','학생시위에대한 발포명령','정부통령선거부정','정치깡패들의 고대생 폭력사건'등이었다.
부정선거 원흉들을 처단함에있어 국민감정을 무시하는 사법운영도 문제지만국민감정에만 영합하고 법이론을 떠난 사법운영은 더 큰 문제라는 의견에서비롯된 선거부정에대한 면소판결은 반대시위를 불러오는등 엄청난 파문을 불러왔다. 그러나 6대사건의 판결은 우리 사법사상 가장 용기있는 판결로 평가되기도한다. 당시 재판장은 후일 "위정자가 법을 지키지않았기 때문에 4.19가 일어났는데 법관마저 법을 제쳐둔채 감정대로 판결할수없었다"고 회고했다.
5.16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현역대령을 법원행정처장에 임명,법관임용자격없이 법원행정처장으로 임명된 최초 케이스로 기록됐다. 징계의 종류에 면직이 추가된 법관징계법도 공포됐다. 한일회담 반대시위자에대한 구속영장이기각되자 무장군인이 법원에 난입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동백림사건에대한대법원판결이후에도 재판부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전단과 벽보가 서울지역에 뿌려졌다.
제7대대통령선거가 실시된 71년에는 유독 무죄판결이 많았다. 신민당 김대중후보집 폭발물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김대중후보의 조카를 구속적부심으로석방했으며 국회의원선거 거부를 요구하며 신민당사에 들어갔던 대학생들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월간 '다리'지 필화사건도 무죄판결이 내려졌다.박정희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은지 한달뒤인 71년7월28일 서울지검 이규명검사는 서울형사지법 이범렬부장판사와 최공웅판사등에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부장판사등이 반공법위반 항소사건을 심리하면서 증인심문을 위해 제주도로출장을 나가 변호인으로부터 항공료,숙박비등 9만여원상당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구속영장은 당연히 기각됐고 서울형사지법 법관들의 사표제출이 이어졌다. 사법파동의 시작이었다.
법관들의 사표제출은 전국적으로 확산,당시 각급법원의 판사정원 4백55명중1백50여명이 가담했다. 사법파동에 관련된 검사들의 인사조치가 있고 당시민복기대법원장이 사표를 철회할것을 호소하는등 우여곡절끝에 사법파동은진정됐다. 사법파동의 진정후 이부장판사등이 사표를 제출했으나 최판사의사표는 반려됐다. 현재 대구고등법원 원장으로 재직중인 최판사는 "당시 하루 1천원정도의 출장비로는 판사가 여인숙에서 잘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고회고했다. 사법파동후 형사재판의 증거조사를 위한 출장비는 3배 인상됐다.유신이후 법관에대한 기피신청이 잇따른 가운데 우리 형사재판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법관기피신청 인용결정이 내려졌다. 서울고법형사1부는 불공평한 재판을 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기피신청을 받아들이는 결정을 해 박모부장판사로하여금 김대중피고인의 대통령선거법위반등 사건을 심리하지 못하게한것이다. 당시 재판부기피신청 인용결정은 사법부 스스로 독립성을 수호하고공정한 재판을위한 준열한 자책이었다는 점에서 법조계 안팎의 화제가 되기도했다.
74년에는 무기징역형이 확정돼 복역중이던 죄수가 수감중에 저지른 또 다른범행으로 다시 기소돼 재판을 받던 도중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던 증인을 법정에서 살해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세상을 놀라게했다.5공화국으로 이어지면서 법정에서는 곧잘 혼란이 빚어졌다. 84년 민주정의당당사점거 학생에 대한 공판과정에서 피고인들과 방청인들은 판사의 제지에도불구,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불렀고 재판을 중지하라고 외쳤다.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의 학생들에 대한 재판에서는 '우리는 재판을 거부한다'는구호가 터져나오면서 법정이 일대 혼란속으로 빠져들었다. 피고인들의 재판거부는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불러와 다음날 김석휘법무장관이 경질됐다.당시 이재훈재판장은 '서울미문화원 난입점거 사건에 관한 훈계및 이유요지의 설명'이라는 문서를 작성,선고공판에서 피고인들을 훈계했다. 이판사는 "피고인들이 확신에 찬 행동을 하였더라도 기소후에는 피고인들이 부당하다고부인하고있는 그 법에 의하여 재판을 받아야하는만큼 의연히 임하는것이 떳떳한 자세"라며 "사법부의 독립성은 재판부의 의지와 사법부를 믿어주는 국민적 성원을 기초로하여 이루어진다"고 밝혔다.
단일사건으로는 최대구속자를 기록한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본관점거사건의피고인들은 재판거부에서 나아가 대부분 항소를 포기했다. 재판을 거부한 마당에 재판을 더 받겠다고 항소하는것은 모순이라는 이유였다.법정질서의 혼란상은 6공화국에 와서도 계속됐다. 성고문사건의 문모피고인에 대한 공판에서는 방청인들이 피고인에게 계란과 잉크병을 던져댔고 서울형사지법에서는 방청인들이 고함을 지르며 피고인에게 라이터와 휴지조각을던졌다.
게다가 88년 5월의 미국대사관 폭발물투척사건 공판정에서는 10여명의 방청인들이 재판후 법원직원이 갖고있던 판결문과 소송기록을 찢어버린 사건까지발생 ,충격을 던져주었다. 강경대군 사망사건의 공판도중에는 유족들이 포함된 방청인들이 법정에서 변론중인 변호사의 뺨을 때리는 사건은 대법원장이특별담화를 발표하도록 만들었다. 〈서영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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