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실학-번계 유형원 중-토지 공개념 실학…균전제 주창

'지금의 세상은 모든 일이 제대로 되어가는 것이 없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그저 세월이나 보낼 뿐이다. 어쩌다 현명한 왕과 충신이 옳은 정치를한다해도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한다. 집을 지을때는 그 터를 잘 닦아야한다. 그렇지않으면 아무리 단청을 아름답게 해봐야 곧 무너지고 만다. 정치도 이와같다. 나라를 잘 다스리려는 왕이라도 토지제도를 바로잡지 못하면결코 백성을 안정시키지도 정치나 교육도 올바로 할 수 없다. 토지는 천하의 근본이다. 근본이 바로 서야 모든 제도가 제자리를 찾는다'유형원의 반계수록 첫 머리에 나오는 첫말이다. 이미 3백50여년전 전라도 부안군 우반동에 칩거한 반계는 개혁의 주체를 왕의 결단에 두고 토지공개념을도입하기를 주장했다. 17세기 중반에 조선사회가 꿈꿀 수 있는 유토피아를토지개혁이라는 절대절명의 과제를 통해 풀어보려한 선각자, 유형원의 '반계수록'이 저작되던 당시의 사회적 환경은 어떠했는가.양란을 겪은 조선사회의 토지면적 감소는 심각했다. 경지면적은 왜란 이전에 1백50만~1백70만결에 비하여 평상시 전라도 수준에 해당하는 40만~50만결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개간'을 통해 경작지를 확보하고 농민생활을 개선시키기 위해 개간지에 대해서는 면세의 혜택을 주고 주인이 없는토지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인정해주면서 장려하였다. 그러나 많은 인력이 동원되는 개간은 자연히 왕실이나 권세가의 차지여서 토지겸병과 '부익부, 빈익빈'을 부추기는 주요한 수단이 되었고 많은 자작농민이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반계는 민생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전국의 토지를 각계각층에게 골고루 재분배하라는 지론을 폈다. 고대사회의 정전제(정전제)는 이상적이긴하나 시대에 맞지 않고 '균전제'(균전제)만이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고 주창했다.

균전제의 골간은 모든 계층의 백성이 각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일정한 토지를 국가로부터 받다가 사망하면 반납하는 제도이다.

즉 농민에게는 군전(군전)을 분배한다. 군전은 양인(양인) 신분의 농민에게 토지 1경(경, 오늘날의 약 5천평)씩 균일하게 분배하고, 농민 4명중 1명은 병역에 복무케하는 '병농합일제'를 택했다. 왕족에게는 토지 10~12경씩,선비부터 7품관까지는 4경, 6품이상 8경, 2품이상 12경씩 분급한다. 각 관청에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닌 토지를 분배하지 말고 사세지(사세지, 임금이 조세를 받아쓰도록 특별히 하사한 땅)만 인정했다.

토지분배의 대상은 평민이 20세, 사족은 15세, 여자는 원칙적으로 제외하였다. 관직이 이동된 자는 취임시부터 분배받고, 공인 상인은 농민의 절반, 무당 승려 도사들은 전지를 받지 못하게 했다.

이와같은 토지제도를 실시하려면 전지를 정확히 측량하여 종래 문란한 토지경계와 유치한 양전 기술을 기화로 한 부호의 농간협잡이 사라져야한다고 내다본 유형원은 한 방편으로 결부법(결부법)대신 경묘법(경묘법)을 도입하자고 강조했다.

결부법은 토지의 비옥과 척박함에 따라 재는 단위를 달리하는 주관적 척도법인 반면 경묘법은 토지의 넓이는 같되 그 세액은 차이가 나게하는 보다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제도였던 것이다. 결부법은 문전옥답이라도 장부상으로황무지로 기록되면 세금이 확 줄어드는 폐해를 제도적으로 묵인하고 있는 셈이었다.

'모든 경작지는 9등급으로 나눠 수확량의 15분의 1을 전세 즉 지세로 국가에바치고 나머지 가렴잡세를 폐지해도 나라재정을 충당할 수 있다. 왕실및 중앙 각 관서에 대한 공물, 즉 지방특산물 공납을 폐지하고 지세를 받아서 시장에서 상품을 직접 사서 쓰라'

이같은 반계의 역설은 저 유명한 대동법이 다종다양한 현물공납을 쌀 혹은포로 대납케하여 단순화시킨 것보다 훨씬 더 백성들의 편의를 대변한 것이었다.

문민정부이후 청와대 점심이 설렁탕으로 바뀌어 매스컴을 탔지만 이미 반계는 3백50여년전 왕조시대를 살면서도 '왕실과 중앙 각 관서의 비용은 예산긴축과 함께 예산의 한도를 엄격히 지켜야 할 것'이라는 트인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내수사를 폐지하고 그 소유재산은 반환하며,국왕은 대신 봉록의 10배에 해당하는 예산만으로 검소하게 생활하여야 한다는 왕실재정의 개혁안을 펼치기도 했다.

반계수록에 나타난 유형원의 토지개혁안은 매우 상세하고 구체적이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보면 몇가지 문제점을 지닌다.

그의 토지개혁안이 지닌 첫째 문제점은 균전론이기는 하지만 신분제를 인정했다는 점이다. 일반 농민에게는 1경만 분배하면서 선비에게는 2~4경, 왕의적자인 대군과 서자인 군, 적녀인 공주와 서녀인 옹주에게는 각각 12경씩 차등을 두었다. 그 결과 농민상호간에는 토지분배가 평등하지만 농민과 양반,왕족사이에는 심한 차별이 따랐다.

둘째는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지주소작제도를 인정했고 도도히 흐르는 토지사유제의 발전을 부인했다는 점이다. 현직 관리를 제외한 양반들의 호당 2~4경과 왕족의 궁방전의 호당 10~12경의 토지는 그들 스스로 경작하지 않고 이것을 경작농민에게 소작시킬 것이 명백한 만큼 지주소작제를 스스로 인정한 한계이다. 또 개혁의 주체를 왕의 결단에 둠으로써 당시 권력구조상 실현할 수없는 것이었고 왕조가 새로 개창되어야만 실현될 수 있는 이상안이었다. 이밖에도 토지국유를 주창, 이미 도도히 발전하는 토지사유제의 발전을 부인했다.

하지만 그의 개혁안은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과 그 시대까지 동양인이 생각하였던 합리적인 제도를 폭넓게 수렴하여 이상적인, 그리고 행정에 실효를거둘 수 있는 체계를 갖춘 실학파 최초의 토지개혁안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글 ·최미화기자

사진·정우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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